엔지니어에서 셰프로
컴퓨터 전공 대기업 엔지니어 입사…1년 만에 슬럼프 떨치려 뉴욕 여행
CIA 요리학교에서 되찾은 '꿈'
바비큐에서 찾은 맥주 맛
요리사 반대 부모님, PT로 설득
미국 바비큐 여행…맥주 따라 '다른 맛'
맥주를 더 알고 싶어 자격증 도전
지난 9일 서울 삼성동 라마다호텔에서 만난 한국인 1호 공인 시서론인 손봉균 셰프(38·사진)는 “맥주를 잘 골라 마시면 음식에 맛과 향을 더해주는 역할을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시서론은 미국의 맥주전문가 자격증 제도다. 와인 소믈리에처럼 맥주 자체의 맛을 평가하고 궁합이 맞는 음식을 추천해준다. 손 셰프는 한국인 최초로 이 자격증을 취득했다. 현재 한국인 공인 시서론은 손 셰프를 포함해 3명밖에 없다.
손 셰프는 일반적으로 음식을 먹을 때는 탄산감이 적은 브라운에일이나 레드에일이 좋다고 추천했다. 맥아향이 풍부해 음식에 맛과 향을 더해준다는 이유에서다. 매운 음식에는 맥아를 구운 뒤 한 번 더 볶아 향이 진한 다크라거가 잘 어울리고, 기름기가 많은 음식엔 향이 진하지 않고 탄산이 풍부한 라거가 적합하다고 했다.
맥주는 차갑게 마시는 것이 맛있다고 생각하지만 종류에 따라 맛있는 온도가 다르다는 게 그의 얘기다. 그는 “맥주는 발효되는 온도에서 제일 향이 풍부해 맛있다”며 “라거는 4~7도, 에일은 9~13도에서 마시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컴퓨터만 알던 ‘공돌이’, 셰프를 꿈꾸다
손 셰프가 처음부터 맥주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학에서 컴퓨터를 전공한 그는 2008년 대기업에 입사했다. 다른 대학 동기처럼 엔지니어로 평범한 삶을 살았다. 회사를 다닌 지 1년 만에 슬럼프가 찾아왔다.
회사를 계속 다녀야 하나 고민하며 한 달간 사내에서 롤모델을 찾았다. 손 셰프는 “회사를 계속 다녀서 대리, 과장, 부장이 된다고 할 때 닮고 싶은 사람이 없었다”며 “한 살이라도 젊을 때 꿈을 이루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 꿈은 요리사였다. 학생 시절 친구들이 ‘손장금’으로 부를 만큼 요리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반대했다. 회사가 싫으면 그냥 여행이나 다녀오라며 그를 설득했다. 그는 2010년 회사를 그만두고 미국 뉴욕으로 여행을 갔다. 그리고 세계 3대 요리학교로 꼽히는 CIA를 찾았다. 입학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찾아간 것은 아니었다.
성당으로 사용하던 건물을 개조한 학교에서 학생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강의실에서 다양한 인종의 학생들이 자신의 요리를 만들고 있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뛰고, 나도 꼭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한국에 돌아와 그는 앞으로 목표와 지금의 상황, 미래 청사진 등을 담은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만들었다. 이 자료를 들고 부모님을 찾아가 발표 형식으로 설명했다. “일이 이뤄지는 과정을 도면으로 그리는 공대생 버릇을 못 고친 거죠. 부모님을 설득해 2011년 CIA에 입학했습니다.”
셰프 지망생, 맥주와 사랑에 빠지다
요리를 배우는 일은 재미있었다. 하루 12시간 이상 수업을 듣고 기숙사로 돌아와 혼자 요리를 다시 할 정도였다. 기숙사 지하에 있는 주방에서 밤을 새우며 새로 배운 요리를 다시 해봤다. 성적은 늘 상위권이었다. 입학은 어렵지 않지만 졸업이 쉽지 않은 게 CIA의 특징이다. 함께 입학한 동기 20명 중 한 번도 F를 받지 않고 제때 졸업한 사람은 손 셰프를 포함해 5명에 불과했다.
그가 가장 좋아한 요리는 미국식 바비큐였다. 미국식 바비큐는 크게 자른 고기 덩어리를 12~16시간 동안 저온에서 익혀 내는 요리다. 양념이나 요리법에 따라 다양하게 조리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그는 미국 전역을 돌면서 바비큐만 먹는 여행을 했다. 지역마다 김치 맛이 다르듯 미국 50개 주(州)에서는 저마다의 요리법으로 바비큐를 만들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텍사스, 시카고를 거쳐 오는 일정으로 20일 넘게 걸렸다. 그때 맥주가 늘 곁에 있었다. 그는 “맥주 종류에 따라 바비큐 맛도 달라진다는 것을 알고 맥주에 관해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여행에서 돌아와 맥주를 공부하기 위해 시서론 가이드북이라는 것을 샀다. 책을 보며 맥주 50종을 2병씩 사 비교하며 마셨다. 100병을 모두 마시고 나니 조금은 맥주를 알 것 같았다. 그는 “맥주를 더 알고 싶다는 생각에 자격증을 땄다”고 말했다.
시서론 준비는 쉽지 않았다. 학원이나 교과서가 있는 게 아니라 혼자서 공부해야 했다. 시험 주관사에서 알려주는 것은 시험에 들어가는 범위를 적은 목차와 2008년 시험 문제뿐이었다. 목차를 정하고 정보를 하나하나 채워 나갔다. 인터넷 등에서 상충되는 정보를 발견하면 학교 선생님에게 묻거나 주관사에 전화를 걸어 확인했다. “아무리 해도 잘 모르겠더군요. 무작정 한 번 시험을 보고 감을 익혔습니다. 두 번째 본 시험에서 합격했죠.” 그는 2014년 한국인 최초로 시서론 자격증을 땄다.
맥주의 세계는 무궁무진, 제대로 알리고 싶다
한국으로 돌아온 손 셰프는 동기들과 함께 바비큐 전문 레스토랑 ‘바베쿡스’를 열기도 했다. 지금은 맥주와 음식을 매칭하는 컨설팅 회사 ‘비어셰프’를 운영하고 있다.
공부도 계속하고 있다. 두 달에 한 번 정도 다른 시서론들과 만나 세미나를 하고 있다. 손 셰프는 “커피와 맥주, 치즈와 맥주 등으로 맥주의 다양한 활용 방법을 연구한다”며 “홉, 효모, 맥아, 물의 비율을 조금만 바꿔도 맛과 향이 달라지기 때문에 공부할 것은 무궁무진하다”고 말했다.
수제 맥주 저변을 넓히기 위한 활동도 하고 있다. 경희대 대학원에서 맥주 테이스팅 강의를 하고 있고, 수제 맥주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해 미국 수제 맥주 브랜드인 브루클린 브루어리의 홍보대사로도 활동 중이다. 그는 최근 맥주에 관심이 커지고 있는 것을 긍정적이라고 했다. 하지만 공부만 하려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은 경계했다. 손 셰프는 “맥주 자격증에 관심이 늘고 있는데 이것만 생각하면 맥주를 싫어하게 될 수 있다”며 “맥주를 잘 알고 싶다면 일단 많이 마시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올해 목표는 공인 시서론의 다음 단계인 어드밴스트 시서론에 도전하는 것이다. “1호 공인 시서론이라는 것 때문에 관심을 많이 받는데 능력이 따르지 않을까봐 걱정이 됩니다. 더 많이 공부하고 노력해서 늘 새로운 맥주와 정보를 알려주고 싶습니다.”
■ 시서론의 세계…
美 양조자협회 맥주 감별 자격증
지난 4월 한국서 첫 공인 시험
시서론(Cicerone)은 미국 양조자협회에서 만든 맥주 감별 자격증 제도다. 시서론이란 원래 관광 안내원을 지칭하는 오래된 표현이다. 관광 안내원이 관광지의 역사, 지리 등을 모두 알아야 하듯이, 맥주에 대해서 모든 정보를 알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차용한 것이다.
시서론 자격증은 애초 3단계로 돼 있었다. 첫 단계는 비어서버, 두 번째 단계는 공인 시서론, 가장 높은 단계는 마스터 시서론. 비어서버는 온라인을 통해 시험을 볼 수 있어 한국에도 보유자가 많다. 2단계인 공인 시서론부터는 필기(주관식, 에세이), 실기(맥주 테이스팅) 시험을 치러야 한다. 3단계인 마스터 시서론은 세계에 11명만 가지고 있을 정도로 난이도가 높다. 올해부터는 2, 3단계 사이에 어드밴스트 시서론이 추가됐다. 와인을 감별하는 소믈리에처럼 4단계가 된 것이다.
지난 4월 한국에서 처음으로 공인 시서론 시험이 치러졌다. 11명이 응시해 4명이 합격, 자격증 발급을 기다리고 있다. 연내 한 차례 더 시험이 있을 예정이다. 시서론이 되기 위해서는 술을 마실 줄 알아야 하지만 남보다 뛰어나게 잘 마실 필요는 없다. 한국인 1호 공인 시서론인 손봉균 셰프는 “중요한 것은 맥주의 맛을 파악해서 음식과 어울리게 추천하는 것”이라며 “여러 종류의 맥주를 계속 마시고 테스트해야 하는 만큼 좋아하고 즐길 수 있을 정도는 돼야 한다”고 말했다.
강영연 기자 yy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