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김성호 씨가 자신의 작품 ‘새벽-한라산’ 앞에 서 있다.
서양화가 김성호 씨가 자신의 작품 ‘새벽-한라산’ 앞에 서 있다.
인공의 빛줄기가 제주의 하늘과 바다 사이로 마술처럼 번지며 어둠을 가른다. 깜박이는 조명이 해변에 일렁인가 싶더니 파란 기운으로 바뀌며 새벽을 알린다. 막 잠에서 깨어난 제주의 이야기들이 화면에서 맴돈다. ‘빛의 작가’로 유명한 중견화가 김성호 씨(54)의 작품 ‘범섬’이다.

김씨가 오는 30일까지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제주 풍경을 그린 작품을 모아 개인전을 펼친다. 영남대 미술대와 대학원을 졸업한 김씨는 분방하고 감각적인 붓 터치로 여명의 도시를 하나의 생명체처럼 역동적으로 묘사해왔다. 하늘 위에서 보는 듯한 부감법을 적용한 새벽 풍경화는 강렬한 인상주의 화풍 덕분에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다.

그동안 도시의 여명과 가로등 불빛에 흔들리는 거리의 모습을 화면에 채우던 김씨가 제주 풍경으로 눈을 돌렸다. 2014년 제주시 예술인 마을에 작업실을 차리고 제주의 생명력을 빛으로 치환하는 데 정성을 기울였다. 바다와 한라산, 해변, 건물, 도로, 섬 등에 색채를 칠해 제주를 ‘무욕의 땅’으로 되살려 냈다.

그는 지난 2년간 제주의 새벽 풍경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한 30여점을 전시하며 제목을 ‘섬 불빛 바다, 그리운 제주’로 붙였다. 김씨는 “처음 붓을 들고 빛을 품은 제주의 새벽을 스케치할 때의 흥분을 잊을 수 없다”며 “나만의 독특한 해석을 통해 그곳의 영혼을 담아냈다”고 설명했다.

김씨는 제주의 깊은 밤 또는 새벽녘에 흐르는 빛줄기에 풍경을 오버랩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한라산 설경, 서귀포 해변 풍경, 성산일출봉, 유채해변 등은 시간의 흐름에 빛을 대비시켜 촉촉한 미감을 담아낸 작품이다. 검정 파랑 노랑 회색 등 다양한 색감으로 풍경을 스케치한 다음, 빛줄기와 시간의 빠른 템포를 잡아냈다. 원경, 중경, 근경의 구도는 물론 하늘 위에서 보는 듯한 시점과 넓은 화면 대부분을 과감히 어둠으로 처리하기도 했다. 자연과 인공불빛이 하나가 된 풍경들은 그대로 화폭 속에 이야기로 들어앉는다.

중첩된 굵은 선묘와 감각적이면서 자유분방한 여백의 미도 매력적인 요소다. 그는 “형상만을 보려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 것”이라며 “제주에서 느껴지는 비움의 공간을 포착하려 심혈을 기울였다”고 했다. 그의 그림이 묘한 향수나 추억, 그리움을 자아내는 까닭이다.

김씨는 “내 그림의 주제는 먼 곳이 아닌 일상, 그 자체에서 출발한다”며 “불빛만 희뿌연 제주의 생명력을 그리운 미감으로 기록하고 싶다”고 말했다. (02)734-0458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