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미디어 뉴스룸-정규재 NEWS] "북한의 지식층 유입으로 남한 지력 폭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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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이 대한민국에 남긴 유산은
최대 600만명 내려와
남한 계급구조 사라지고 경쟁의식 생겨 산업화 가속
최대 600만명 내려와
남한 계급구조 사라지고 경쟁의식 생겨 산업화 가속
정규재 뉴스에는 정보와 지식이 있다. 세상을 보는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다. 6·25 전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정규재 주필은 6·25 전쟁이 대한민국의 발전을 가져왔다고 말한다.
정규재 뉴스 2013년 6월19일 방송 ‘아, 6·25 전쟁’에서 정 주필은 “6·25 전쟁은 동족 상잔의 비극이요, 세계사의 유례 없는 전쟁이지만 이젠 아픔만을 생각했던 과거를 넘어 6·25 전쟁이 남긴 유산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 주필은 6·25 전쟁이 거대한 인구의 이동을 낳았다고 강조했다. 북에서 남으로 내려온 사람이 적게는 50만명에서 최대 600만명에 이른다는 다양한 추정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 주필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공산주의를 피해서 내려온 대다수 사람이 지식 계급이거나 지주였다”며 “세상 물정을 잘 아는 사람들이 내려와 남한에는 지력의 폭발, 북한에는 지력의 공백이 일어났다”고 설명했다. 북한의 지력 공백 때문에 3대 독재 체제도 유지될 수 있었다고 한다.
6·25 전쟁의 두 번째 의미로는 ‘봉건사회의 해체’를 들었다. 정 주필은 “조선시대와 일제 강점기를 거친 기존의 구조를 송두리째 해체한 것은 6·25 전쟁이었다”며 “계급 구조가 사라지고 한국인 특유의 경쟁의식이 생겨났다”고 얘기했다. 계급 구조가 사라져 ‘노력한 만큼 잘살 수 있다’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고, 이런 사회 변화가 정주영, 이병철 같은 기업가를 탄생시키는 기초가 됐다는 것이다.
세 번째 의미로는 ‘국가 관리 계층의 탄생’을 들었다. 바로 4·19의 혼란을 극복하고 근대화 혁명을 주도한 5·16 군인 세력이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생긴 조직은 아니다. 6·25 전쟁을 거치면서 숙련된 한국군을 길러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음을 깨달은 미군이 한국군에 현대의 행정과 기술을 전수해 길러낸 것이다.
이들이 가진 기술에 군대 조직을 통솔하는 경험이 합쳐져 한국 사회에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계층이 탄생했다. 정 주필은 “이들이 조국 산업화의 깃발을 들고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산업화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군인 계층과 함께 대한민국을 이끈 계층은 국비로 유학한 인재들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교육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었다. 배움에 목이 말랐던 그는 지역이나 신분보다 실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교육이 절실했다. 그래서 6·25 전쟁 이후 국비로 외국에 많은 인재를 보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교육받은 군인과 많은 학자들이 대한민국으로 다시 돌아와 국가 발전을 이끌었다.
네 번째 의미는 ‘경쟁의식’이다. 북한에 대한 강력한 경쟁의식이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는 데 한몫했다. 일본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도 저렇게 발전하는데 우린들 못하랴’라는 경쟁의식으로 산업화에 박차를 가했다. 1971년부터 1973년으로 이어지는 중화학공업 육성 의지는 침략 세력에 지지 않겠다는 경쟁의식에서 나왔다.
이외에도 정 주필은 “동서 냉전시대에 줄을 잘 선 것이 대한민국을 성장으로 이끌었다”며 “서방국가의 개방적 태도가 우리의 무역환경을 만들었고 우리는 그것을 토대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했다.
6·25 전쟁이 일어난 지 66년이 지났다. 남한과 북한은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그 선택의 결과는 너무나 명백하다. 정 주필은 “6·25 전쟁을 통해 대한민국 역사가 어떻게 쓰여졌는지를 정면으로 직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형진 정규재 뉴스 PD starhawk@hankyung.com
정규재 뉴스 2013년 6월19일 방송 ‘아, 6·25 전쟁’에서 정 주필은 “6·25 전쟁은 동족 상잔의 비극이요, 세계사의 유례 없는 전쟁이지만 이젠 아픔만을 생각했던 과거를 넘어 6·25 전쟁이 남긴 유산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 주필은 6·25 전쟁이 거대한 인구의 이동을 낳았다고 강조했다. 북에서 남으로 내려온 사람이 적게는 50만명에서 최대 600만명에 이른다는 다양한 추정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 주필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공산주의를 피해서 내려온 대다수 사람이 지식 계급이거나 지주였다”며 “세상 물정을 잘 아는 사람들이 내려와 남한에는 지력의 폭발, 북한에는 지력의 공백이 일어났다”고 설명했다. 북한의 지력 공백 때문에 3대 독재 체제도 유지될 수 있었다고 한다.
6·25 전쟁의 두 번째 의미로는 ‘봉건사회의 해체’를 들었다. 정 주필은 “조선시대와 일제 강점기를 거친 기존의 구조를 송두리째 해체한 것은 6·25 전쟁이었다”며 “계급 구조가 사라지고 한국인 특유의 경쟁의식이 생겨났다”고 얘기했다. 계급 구조가 사라져 ‘노력한 만큼 잘살 수 있다’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고, 이런 사회 변화가 정주영, 이병철 같은 기업가를 탄생시키는 기초가 됐다는 것이다.
세 번째 의미로는 ‘국가 관리 계층의 탄생’을 들었다. 바로 4·19의 혼란을 극복하고 근대화 혁명을 주도한 5·16 군인 세력이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생긴 조직은 아니다. 6·25 전쟁을 거치면서 숙련된 한국군을 길러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음을 깨달은 미군이 한국군에 현대의 행정과 기술을 전수해 길러낸 것이다.
이들이 가진 기술에 군대 조직을 통솔하는 경험이 합쳐져 한국 사회에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계층이 탄생했다. 정 주필은 “이들이 조국 산업화의 깃발을 들고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산업화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군인 계층과 함께 대한민국을 이끈 계층은 국비로 유학한 인재들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교육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었다. 배움에 목이 말랐던 그는 지역이나 신분보다 실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교육이 절실했다. 그래서 6·25 전쟁 이후 국비로 외국에 많은 인재를 보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교육받은 군인과 많은 학자들이 대한민국으로 다시 돌아와 국가 발전을 이끌었다.
네 번째 의미는 ‘경쟁의식’이다. 북한에 대한 강력한 경쟁의식이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는 데 한몫했다. 일본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도 저렇게 발전하는데 우린들 못하랴’라는 경쟁의식으로 산업화에 박차를 가했다. 1971년부터 1973년으로 이어지는 중화학공업 육성 의지는 침략 세력에 지지 않겠다는 경쟁의식에서 나왔다.
이외에도 정 주필은 “동서 냉전시대에 줄을 잘 선 것이 대한민국을 성장으로 이끌었다”며 “서방국가의 개방적 태도가 우리의 무역환경을 만들었고 우리는 그것을 토대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했다.
6·25 전쟁이 일어난 지 66년이 지났다. 남한과 북한은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그 선택의 결과는 너무나 명백하다. 정 주필은 “6·25 전쟁을 통해 대한민국 역사가 어떻게 쓰여졌는지를 정면으로 직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형진 정규재 뉴스 PD starhaw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