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시] 비에도 그림자가 - 나희덕(1966~ )
소나기 한 차례 지나고
과일 파는 할머니가 비 맞으며 앉아 있던 자리
사과 궤짝으로 만든 의자 모양의
고슬고슬한 땅 한 조각
젖은 과일을 닦느라 수그린 할머니의 둥근 몸 아래
남몰래 숨어든 비의 그림자
자두 몇 알 사면서 훔쳐본 마른 하늘 한 조각

시집 《사라진손바닥》(문학과지성사)中


정류장 근처에 과일 파는 가게가 있다. 바구니에 쌓아놓고 파는 과일들 반들반들하다. 비가 쏟아져도 장사는 한다. 날마다 새벽시장에서 과일을 떼어오는 수고로움도, 과일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닦아놓는 그 손길도, 그 손길 끝에 반들거리는 과일들도 다 눈부시다. 비에 젖지 않은 자투리 공간, 거기 숨어든 비의 그림자도 환하다. 안 되겠다. 정류장에서 비켜 나와 천도복숭아와 자두 한 바구니 사들고 집으로 간다. 아삭! 벌써 입에서 군침이 돈다.

이소연 < 시인(2014 한경 청년신춘문예 당선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