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여인천하
역사적으로 기억되는 여성은 대개 ‘권력을 좇는 악녀’로 각인돼 있다. 장희빈, 장녹수, 정난정 등 ‘조선의 3대 악녀’부터 그렇다. 중국의 양귀비, 서태후도 그런 사례다. 장희빈이 6번이나 TV사극으로 다뤄진 것도 그의 삶이 막장 드라마적 요소를 두루 갖춘 때문일 것이다.

사극에서 여인천하라는 말에는 궁중 암투의 뉘앙스가 짙다. 월탄 박종화의 역사소설 《여인천하》도 중종비 문정왕후가 20년 수렴청정으로 정치를 뒤흔든 게 소재다. 서양 사극의 단골인물은 앤 불린이다. 왕비 갈아치우기를 밥 먹듯 했던 헨리 8세의 둘째 왕비다. 앤이 정치에 적극 개입하다 처형되는 과정은 장희빈과 흡사하다. 헨리 8세와 세 왕비, 권력 투쟁과 ‘원조 브렉시트’라는 영국 국교회 설립 등을 그린 미드가 ‘튜더스’다.

물론 남성우월시대에 여성이 역사 전면에 나선 경우도 있었다. 선덕여왕, 측천무후, 엘리자베스1세 등이다. 대개는 구중심처에서 왕을 움직이는 음모와 질투의 화신으로 기록되기 일쑤였다. 그러나 정쟁의 소용돌이에서 입지전적 삶을 산 여성들을 무조건 악녀로 단정하는 것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역사는 남성과 승자의 기록이다. 실제 궁중 막장은 연산군, 헨리 8세 등 남성이 만들었다. 그럼에도 비난의 화살을 여성에게 돌리는 것은 동서양이 공통인 듯하다.

여성이 남성과 대등해진 것은 불과 얼마 안 된다. 계몽사상가 루소조차 “여성은 남성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창조됐다”고 했다. 투표권부터 철저히 차별했다. 미국의 백인 여성(1920년)은 흑인 남성(1870년)보다 50년 뒤에 투표장에 갈 수 있었다. 인권과 평등의 나라라는 프랑스도 1946년에야 허용해 우리나라보다 고작 2년 앞섰다. 스페인(1970년) 스위스(1971년)는 한참 뒤다.

오늘날 여성의 약진 속에 차원이 다른 여인천하가 펼쳐지고 있다. 미국 대선은 힐러리 클린턴이 일단 유력하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재닛 옐런 미 Fed(중앙은행) 총재,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와 더불어 세계경제 5대 파워 중 4자리를 여성이 이끌 판이다. 브렉시트 이후 영국 총리는 누가 돼도 여성이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후임 후보 11명 중 5명도 여성이다. 아시아에서도 박근혜 대통령, 대만의 차이잉원 총통, 미얀마의 아웅산수지 등 여성이 대세다.

그러나 지도자를 평가하는 관점에선 차이가 있다. 남성 지도자는 신중, 현명, 추진력 등을 갖추면 그만이다. 여성 리더에게는 그런 덕목에다 포용, 배려, 섬세함까지 요구한다. 여성의 시대에 눈높이도 높아졌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