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잃어버려서는 안 될 20년
히로시마는 후덥지근했다. 태풍 영향으로 전날 많은 비가 내려 공기가 습했다. 무더운 날씨지만 평화기념공원은 관광객으로 붐볐다. 원폭 투하 현장을 둘러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공원 한쪽에 자리잡고 있는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를 찾아 헌화하면서 우리 조상이 겪은 참혹한 고통과 희생에 깊이 애도했다.

지난주 일본에 다녀왔다. 현지 무역관장과 함께 무역투자 확대전략회의를 열기 위해서였다. 최근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영향으로 엔화 강세현상이 급격히 일어나면서 대(對)일 수출환경이 개선되고 있다. 서둘러 엔고 활용방안을 모색해 대일 수출의 반전 기회를 잡아보자는 취지였다.

회의 장소가 남달라서였을까. 이번 출장은 양국 간 얽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고민해보는 계기가 됐다. 히로시마 원폭 피해는 엄청났다. 당시 38만명 인구 중 20만명이 피해를 봤다. 동포가 10만명에 달했는데 그중 2만명이 희생됐다. 군수산업이 발달했던 곳이라 징용으로 끌려온 이들이 많아 희생도 그만큼 컸다.

한국인은 이런 희생을 헛되이 여기지 않았다. 해방과 6·25전쟁을 겪은 이후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했다. 원조를 받던 최빈국이 불과 한 세대 만에 세계 10위권 경제대국 반열에 올라섰다. 세계는 기적이라는 찬사를 보냈고, 한국을 배우려는 나라도 많아졌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한국은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따라가고 있다는 우려가 많다. 일본은 이 기간에 고령화, 저금리, 성장둔화, 각종 부채 증가 등의 후유증을 앓고 있는데 지금 우리가 당면한 문제와 꽤 비슷하다.

지금 우리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한국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10년째 2만달러대에 머물러 있다.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이런 의미에서 앞으로 20년은 우리가 선진국으로 올라서느냐, 못하느냐를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시기가 될 것이다.

모든 국민의 분발과 경각심이 요구된다. 국민적 에너지를 모으고, 유무형의 경험과 자산을 결집해 미래를 잘 준비해야 한다. 절대로 잃어버려서는 안 될 20년을 만들어야 한다. 히로시마의 한국인 희생자 영령도 오늘의 후손에게 그렇게 염원하고 있으리라.

김재홍 < KOTRA 사장 jkim1573@kotra.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