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7만건 '탈탈 터는' 압수수색] 미국·독일, 혐의 관련된 증거만 복사…한국선 책상위 물건 몽땅 들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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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2012~2015년 세금계산서' 등
압수수색 대상·기간 구체적 표기
한국, 고객정보 다 가져가 영업 중단
수사기관에 찍힐까봐 항의도 못해
검찰 "증거 확보하려면 불가피"
압수수색 대상·기간 구체적 표기
한국, 고객정보 다 가져가 영업 중단
수사기관에 찍힐까봐 항의도 못해
검찰 "증거 확보하려면 불가피"
“고객 정보와 영업 기록이 담긴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모조리 가져가더라고요.”
중견기업 A사의 영업본부는 몇년 전 압수수색을 받은 뒤 한동안 영업 활동을 접어야 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수사관이 사무실 책상 위에 있는 물건을 몽땅 들고 가 업무를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상장기업 B사의 재무담당 임원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는 “주요 회계장부와 메모리카드는 물론이고 회계 프로그램이 깔린 컴퓨터를 통째로 들고 가 상당 기간 업무가 마비됐다”고 했다. 검찰과 경찰 등 수사기관의 압수수색이 시작되면 기업 경영은 순간 ‘올스톱’된다. 시장에서 기업에 대한 압수수색 자체를 최악의 경영 불확실성으로 받아들이는 이유기도 하다.
“업무는 어떻게 하라고…”
기업들은 압수수색이 너무 광범위하고 강도도 지나치게 세다고 하소연한다. 롯데그룹에 대한 압수수색이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검찰은 지난달 10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자택과 집무실은 물론 호텔롯데 등 주요 계열사 16곳을 뒤져 1t 트럭 10대 분량의 문서와 컴퓨터 하드디스크, 휴대폰 등을 가져갔다. 역대 최대 규모인 240여명의 검사와 수사관이 동원된 것으로 알려졌다. 일반인들은 압수수색 규모가 클수록 ‘더 중한 범죄를 저질렀을 것’이란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국내에 있는 외국인은 검찰의 롯데그룹 압수수색과 관련해 ‘믿기 어렵다(unbelievable)’는 반응을 보인다. 한국 기업에서 일하는 한 외국인 임원은 “미국 등 해외 수사기관은 혐의와 관련한 증거만 복사하는 방법으로 압수해 간다”며 “컴퓨터 하드디스크와 휴대폰 등을 모두 압수당하면 직원들이 어떻게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반문했다.
미국 독일 등 선진국에서는 수사기관이 범죄와 관련없는 물품을 압수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다. 미국은 압수수색 대상을 영장에 구체적으로 표기한다. 예를 들어 ‘허위 세금계산서 발행과 관련한 모든 서류’같이 모호한 표현은 효력이 없다. ‘허위 세금계산서를 발행한 혐의가 있는 2012년부터 2015년까지의 세금계산서’와 같이 구체화해야 한다. 연방법에 따라 수사 담당관은 압수수색의 근거가 되는 혐의가 허위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선서진술서’를 작성해야 한다. 여기에 허위 진술이 포함된 것으로 드러나면 영장이 무효가 되거나 압수한 물품을 증거로 채택할 수 없다.
모호한 형사소송법
국내 형사소송법에도 압수수색에 대한 제한 규정이 있다. 제106조 3항에서 ‘압수의 목적물이 컴퓨터용 디스크, 그 밖에 이와 비슷한 정보저장매체인 경우에는 기억된 정보의 범위를 정해 출력하거나 복제해 제출받아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범위를 정해 출력 또는 복제하는 방법이 불가능하거나 압수 목적을 달성하기에 현저히 곤란하다고 인정될 때는 정보저장매체 등을 압수할 수 있다’는 모호한 예외조항이 달려 있다.
대대적인 압수수색에도 범죄 혐의를 상당 부분 입증하지 못하거나 무죄로 결론난 사례도 적지 않다. 포스코 KT 등이 대표적이다. 검찰은 지난해 3월부터 이상득 전 의원과 정준양 전 포스코 회장 등의 비리 의혹을 캐기 위해 포스코 본사는 물론 국내외 계열사, 협력사까지 대대적으로 압수수색했다. 1년 가까이 수사가 이어지면서 소환된 사람만 100여명에 이른다. 하지만 이 전 의원과 정 전 회장 등 핵심 피의자가 모두 불구속 기소되는 등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법원도 검찰의 무리한 수사 행태에 제동을 걸었다. 대법원은 2011년 국내 C 제약업체 압수수색과 관련해 지난해 7월 전원합의체를 열어 “수사기관이 압수수색물을 통째로 가져가 복제하더라도 그 과정을 압수수색 대상자나 변호인이 보고 과정상 문제제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판결했다. 또 “압수수색 과정에서 혐의와 별도의 범죄사실을 발견했더라도 이를 압수수색하려면 적법한 절차에 따른 압수수색 영장이 추가로 필요하다”고 했다. 법원은 검찰이 C사를 의약품 리베이트 수수 혐의로 압수수색하면서 확보한 증거 일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은 수사기관에 찍힐까봐 현장에서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렵다고 하소연한다. ‘또 언제 털릴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한 대기업 임원은 “검찰에 밉보여 좋을 게 없지 않으냐”고 했다.
검찰은 증거를 없애기 전 신속하게 압수수색해야 하는 만큼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고 항변한다. 한 검사는 “수사 초기엔 제보자 진술 등을 기반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압수수색 대상을 특정하기 힘들다”며 “증거가 완벽하지 않으면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이끌어내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한 판사는 “국내 법원은 구속이나 구류 등 인신(人身)에 관한 기본권에 대해선 엄격한 잣대를 대고 있지만 압수수색과 같이 장소나 물건에 대한 기본권에는 다소 무관심한 게 사실”이라고 했다. 지난해 법원의 압수수색 영장 발부율은 97.7%였다.
고윤상/심은지 기자 kys@hankyung.com
중견기업 A사의 영업본부는 몇년 전 압수수색을 받은 뒤 한동안 영업 활동을 접어야 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수사관이 사무실 책상 위에 있는 물건을 몽땅 들고 가 업무를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상장기업 B사의 재무담당 임원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는 “주요 회계장부와 메모리카드는 물론이고 회계 프로그램이 깔린 컴퓨터를 통째로 들고 가 상당 기간 업무가 마비됐다”고 했다. 검찰과 경찰 등 수사기관의 압수수색이 시작되면 기업 경영은 순간 ‘올스톱’된다. 시장에서 기업에 대한 압수수색 자체를 최악의 경영 불확실성으로 받아들이는 이유기도 하다.
“업무는 어떻게 하라고…”
기업들은 압수수색이 너무 광범위하고 강도도 지나치게 세다고 하소연한다. 롯데그룹에 대한 압수수색이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검찰은 지난달 10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자택과 집무실은 물론 호텔롯데 등 주요 계열사 16곳을 뒤져 1t 트럭 10대 분량의 문서와 컴퓨터 하드디스크, 휴대폰 등을 가져갔다. 역대 최대 규모인 240여명의 검사와 수사관이 동원된 것으로 알려졌다. 일반인들은 압수수색 규모가 클수록 ‘더 중한 범죄를 저질렀을 것’이란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국내에 있는 외국인은 검찰의 롯데그룹 압수수색과 관련해 ‘믿기 어렵다(unbelievable)’는 반응을 보인다. 한국 기업에서 일하는 한 외국인 임원은 “미국 등 해외 수사기관은 혐의와 관련한 증거만 복사하는 방법으로 압수해 간다”며 “컴퓨터 하드디스크와 휴대폰 등을 모두 압수당하면 직원들이 어떻게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반문했다.
미국 독일 등 선진국에서는 수사기관이 범죄와 관련없는 물품을 압수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다. 미국은 압수수색 대상을 영장에 구체적으로 표기한다. 예를 들어 ‘허위 세금계산서 발행과 관련한 모든 서류’같이 모호한 표현은 효력이 없다. ‘허위 세금계산서를 발행한 혐의가 있는 2012년부터 2015년까지의 세금계산서’와 같이 구체화해야 한다. 연방법에 따라 수사 담당관은 압수수색의 근거가 되는 혐의가 허위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선서진술서’를 작성해야 한다. 여기에 허위 진술이 포함된 것으로 드러나면 영장이 무효가 되거나 압수한 물품을 증거로 채택할 수 없다.
모호한 형사소송법
국내 형사소송법에도 압수수색에 대한 제한 규정이 있다. 제106조 3항에서 ‘압수의 목적물이 컴퓨터용 디스크, 그 밖에 이와 비슷한 정보저장매체인 경우에는 기억된 정보의 범위를 정해 출력하거나 복제해 제출받아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범위를 정해 출력 또는 복제하는 방법이 불가능하거나 압수 목적을 달성하기에 현저히 곤란하다고 인정될 때는 정보저장매체 등을 압수할 수 있다’는 모호한 예외조항이 달려 있다.
대대적인 압수수색에도 범죄 혐의를 상당 부분 입증하지 못하거나 무죄로 결론난 사례도 적지 않다. 포스코 KT 등이 대표적이다. 검찰은 지난해 3월부터 이상득 전 의원과 정준양 전 포스코 회장 등의 비리 의혹을 캐기 위해 포스코 본사는 물론 국내외 계열사, 협력사까지 대대적으로 압수수색했다. 1년 가까이 수사가 이어지면서 소환된 사람만 100여명에 이른다. 하지만 이 전 의원과 정 전 회장 등 핵심 피의자가 모두 불구속 기소되는 등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법원도 검찰의 무리한 수사 행태에 제동을 걸었다. 대법원은 2011년 국내 C 제약업체 압수수색과 관련해 지난해 7월 전원합의체를 열어 “수사기관이 압수수색물을 통째로 가져가 복제하더라도 그 과정을 압수수색 대상자나 변호인이 보고 과정상 문제제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판결했다. 또 “압수수색 과정에서 혐의와 별도의 범죄사실을 발견했더라도 이를 압수수색하려면 적법한 절차에 따른 압수수색 영장이 추가로 필요하다”고 했다. 법원은 검찰이 C사를 의약품 리베이트 수수 혐의로 압수수색하면서 확보한 증거 일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은 수사기관에 찍힐까봐 현장에서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렵다고 하소연한다. ‘또 언제 털릴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한 대기업 임원은 “검찰에 밉보여 좋을 게 없지 않으냐”고 했다.
검찰은 증거를 없애기 전 신속하게 압수수색해야 하는 만큼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고 항변한다. 한 검사는 “수사 초기엔 제보자 진술 등을 기반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압수수색 대상을 특정하기 힘들다”며 “증거가 완벽하지 않으면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이끌어내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한 판사는 “국내 법원은 구속이나 구류 등 인신(人身)에 관한 기본권에 대해선 엄격한 잣대를 대고 있지만 압수수색과 같이 장소나 물건에 대한 기본권에는 다소 무관심한 게 사실”이라고 했다. 지난해 법원의 압수수색 영장 발부율은 97.7%였다.
고윤상/심은지 기자 k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