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bal CEO & Issue focus] 우에하라 가쓰히코 일본 에이원정밀 창업자, '주문 당일 납품' 강소기업 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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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교 출신 나사공장 기술자
직원 3명으로 부품업체 창업
밭 가는 소처럼 기본 지켜
높은 품질·적정 가격·짧은 납기
39년간 연평균 40% 이익률
주문 받으면 5분내 작업 시작
경쟁사 1~2주 걸리는 일
70%는 하루만에 납품 완료
전세계 거래처 1만3000곳
모든 직원 정규직
이익 20%는 직원에 돌려줘
월급도 100만엔 정도 높아
직원 3명으로 부품업체 창업
밭 가는 소처럼 기본 지켜
높은 품질·적정 가격·짧은 납기
39년간 연평균 40% 이익률
주문 받으면 5분내 작업 시작
경쟁사 1~2주 걸리는 일
70%는 하루만에 납품 완료
전세계 거래처 1만3000곳
모든 직원 정규직
이익 20%는 직원에 돌려줘
월급도 100만엔 정도 높아
일본 에이원정밀은 변두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치코바(町工場·동네공장)다. 자동선반에 들어가는 부품을 제작한다. 도쿄도 후추(府中)시 주택가에 있는 본사에 10여명, 도쿄에서 차로 2시간가량 떨어진 야마나시(山梨)현 니라사키시에 있는 공장에 110명 남짓한 직원이 일한다.
이 조그만 회사가 일본에서 가장 수익률이 높은 기업 중 하나로 꼽힌다. 1970년 창업 이래 39년간 평균 경상이익률 40%를 달성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엔 떨어졌지만 지금도 25~27%의 경상이익률을 내고 있다. 회사 창업자인 우메하라 가쓰히코(梅原勝彦)는 “제조업의 기본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높은 품질과 적정한 가격, 짧은 납기다. 이를 ‘밭 가는 소처럼’ 우직하게 지켰을 뿐이라고 했다.
중졸의 장인, 31세에 자기 회사 세워
우메하라는 1939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도쿄에서 공장을 운영했다. 제법 번성했지만 전쟁통에 무너졌다. 그가 소학교(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 공장이 도산했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우메하라는 친척집을 전전했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그는 가와사키(川崎)시에 있는 나사 공장에 취직했다. 오전 6시부터 오후 8시까지 일했다.
우메하라는 2011년 출간한 자서전에서 “나는 학력이 높지 않다. 경영 수업을 따로 받은 적도 없다. 단지 직원들과 함께 땀 흘려 일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의 최종 학력은 중졸이다. 공장일을 하며 16세 때 다닌 야간중학교가 전부다.
당시는 하루하루 먹고살기 위해 어른 아이 가릴 것 없이 일했다. 우메하라는 더 열심히 일했다. 목표가 있었다. 하루빨리 장인이 돼 직접 공장을 차리는 일이었다. 공장 10곳을 거치며 기술과 경험을 쌓았다. 22세가 되자 30명을 밑에 거느리고 실력을 인정받았다. 당시 그의 연봉은 약 2만5000엔. 대졸 초봉 1만2000엔의 두 배가 넘었다.
그가 첫 회사를 세운 것은 26세인 1965년이었다. 친형과 함께였다. 수치제어(NC)선반을 도입하는 문제로 의견 충돌이 있었다. 장인이 감과 경험으로 제작하던 기계 부품을 NC선반을 이용하면 정확한 수치로 깎아내 만들 수 있었다. 우메하라는 형에게 말했다. “지금부터는 NC야. 우리 회사도 NC선반을 들여놔야 해.” 하지만 비싼 가격에 형은 손을 가로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NC선반 한 대는 2000만엔이 넘었다. 500만엔만 있으면 도쿄 시내에 집을 사던 시절이었다. 신중한 형과 달리 우메하라는 긍정적인 사고의 소유자였다. 31세이던 1970년 직원 3명을 데리고 독립해 에이원정밀을 세웠다.
하루 만에 납품하는 짧은 납기로 돌풍
에이원정밀은 자동선반에 들어가는 부품인 ‘캠’을 제작했다. 캠은 자동선반 회전축에 부착해 운동 방향을 조절하고 칼날을 제어하는 장치다. 우메하라의 예상대로 NC선반으로 제작한 캠은 정밀도가 높았다. 납품도 빨랐다. 소문이 퍼지면서 주문이 몰렸다.
공작기계 트렌드가 소형자동선반에서 NC선반으로 바뀔 것에 대비해 1976년부터는 ‘콜릿 척’을 생산했다. 콜릿 척은 선반 회전대에 설치해 가공 대상물을 고정시키는 금속 장치다. NC선반은 고속으로 대상물을 회전시키며 가공하는 기계다. 기계와 가공물이 딱 들어맞아야 한다. 미리 만들어 놓을 수 없고 주문을 받아 생산하는 고객 맞춤형 부품이다. 현재 에이원정밀은 일본 콜릿 척 시장에서 점유율 60%, 캠 시장에서 점유율 90%를 차지하고 있다.
우메하라는 짧은 납기를 에이원정밀의 최대 강점으로 삼았다. 에이원은 콜릿 척 수주에서 납품까지 보통 하루, 늦어도 3일 안에 끝낸다. 당일 오후 3시까지 들어온 주문의 70%는 그날 안에 제조해 발송한다. 주문 100%를 당일 제조·배송할 수도 있지만 다음날 오전에 일이 없을 것을 고려해 급하지 않은 30%는 남겨둔다. 다른 회사는 보통 1주, 길면 2주 가까이 걸린다. “도면을 보이면 자동으로 제조하는 기계가 에이원정밀에 있다”는 소문이 업계에 돈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우메하라는 “납기에 집착하게 된 이유는 품질과 가격으로는 경쟁하기 힘들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품질 면에선 이미 업계 최고라는 기업이 있었고 가격을 낮춰선 자금력이 풍부한 대기업과의 가격 인하 경쟁에서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직원들 오후 5시30분 ‘조기 퇴근’
품질을 희생한 것도 아니었다. 상황에 따라 경쟁사보다 두 배 많은 시간을 들여 제품을 생산할 때도 있다. 비결은 의외로 간단했다. 낭비되는 시간을 줄이는 것이다. 후추시 본사에서 주문 전화를 받는 즉시 팩스를 야마나시현 공장에 보낸다. 주문을 받고 공장에서 작업에 들어가기까지 5분이 걸리지 않는다. 현장 담당자는 자재 창고에서 재료를 골라 작업을 시작한다. 재료를 갖고 나올 때 허가를 받을 필요도 없다. 빠른 납품 덕에 에이원정밀 거래처는 해외를 포함, 1만3000여곳에 이른다.
에이원정밀은 불황이 와도 판매 가격을 낮추지 않았다. 우메하라는 “한번 낮춘 가격은 경기가 살아나도 다시 올리기 힘들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그렇다고 가격을 올리지도 않았다. 철저한 비용 통제와 생산성 향상을 통해서였다.
비용을 통제한다고 직원을 쥐어짠 것은 아니다. 직원은 모두 정규직이다. 평균 연봉은 타사 대비 100만엔가량 높고, 이익의 20%는 직원에게 돌려준다. 오전 8시30분에 출근해 오후 5시30분에 퇴근한다. 퇴근시간을 철저히 지키는 대신 그날 할 일은 그날 끝내야 한다.
에이원정밀은 2003년 자스닥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마치코바 가운데 최초였다. 우메하라는 2007년 사장 자리를 물려주고 경영자문역으로 물러났지만 여전히 본사로 출근해 업무를 보고 있다. 우메하라는 “기본을 지키는 일은 귀찮고 번거롭지만 그렇게 해야 장기적인 고수익이 가능하다”며 “목에 칼이 들어와도 기본만큼은 반드시 사수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이 조그만 회사가 일본에서 가장 수익률이 높은 기업 중 하나로 꼽힌다. 1970년 창업 이래 39년간 평균 경상이익률 40%를 달성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엔 떨어졌지만 지금도 25~27%의 경상이익률을 내고 있다. 회사 창업자인 우메하라 가쓰히코(梅原勝彦)는 “제조업의 기본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높은 품질과 적정한 가격, 짧은 납기다. 이를 ‘밭 가는 소처럼’ 우직하게 지켰을 뿐이라고 했다.
중졸의 장인, 31세에 자기 회사 세워
우메하라는 1939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도쿄에서 공장을 운영했다. 제법 번성했지만 전쟁통에 무너졌다. 그가 소학교(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 공장이 도산했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우메하라는 친척집을 전전했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그는 가와사키(川崎)시에 있는 나사 공장에 취직했다. 오전 6시부터 오후 8시까지 일했다.
우메하라는 2011년 출간한 자서전에서 “나는 학력이 높지 않다. 경영 수업을 따로 받은 적도 없다. 단지 직원들과 함께 땀 흘려 일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의 최종 학력은 중졸이다. 공장일을 하며 16세 때 다닌 야간중학교가 전부다.
당시는 하루하루 먹고살기 위해 어른 아이 가릴 것 없이 일했다. 우메하라는 더 열심히 일했다. 목표가 있었다. 하루빨리 장인이 돼 직접 공장을 차리는 일이었다. 공장 10곳을 거치며 기술과 경험을 쌓았다. 22세가 되자 30명을 밑에 거느리고 실력을 인정받았다. 당시 그의 연봉은 약 2만5000엔. 대졸 초봉 1만2000엔의 두 배가 넘었다.
그가 첫 회사를 세운 것은 26세인 1965년이었다. 친형과 함께였다. 수치제어(NC)선반을 도입하는 문제로 의견 충돌이 있었다. 장인이 감과 경험으로 제작하던 기계 부품을 NC선반을 이용하면 정확한 수치로 깎아내 만들 수 있었다. 우메하라는 형에게 말했다. “지금부터는 NC야. 우리 회사도 NC선반을 들여놔야 해.” 하지만 비싼 가격에 형은 손을 가로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NC선반 한 대는 2000만엔이 넘었다. 500만엔만 있으면 도쿄 시내에 집을 사던 시절이었다. 신중한 형과 달리 우메하라는 긍정적인 사고의 소유자였다. 31세이던 1970년 직원 3명을 데리고 독립해 에이원정밀을 세웠다.
하루 만에 납품하는 짧은 납기로 돌풍
에이원정밀은 자동선반에 들어가는 부품인 ‘캠’을 제작했다. 캠은 자동선반 회전축에 부착해 운동 방향을 조절하고 칼날을 제어하는 장치다. 우메하라의 예상대로 NC선반으로 제작한 캠은 정밀도가 높았다. 납품도 빨랐다. 소문이 퍼지면서 주문이 몰렸다.
공작기계 트렌드가 소형자동선반에서 NC선반으로 바뀔 것에 대비해 1976년부터는 ‘콜릿 척’을 생산했다. 콜릿 척은 선반 회전대에 설치해 가공 대상물을 고정시키는 금속 장치다. NC선반은 고속으로 대상물을 회전시키며 가공하는 기계다. 기계와 가공물이 딱 들어맞아야 한다. 미리 만들어 놓을 수 없고 주문을 받아 생산하는 고객 맞춤형 부품이다. 현재 에이원정밀은 일본 콜릿 척 시장에서 점유율 60%, 캠 시장에서 점유율 90%를 차지하고 있다.
우메하라는 짧은 납기를 에이원정밀의 최대 강점으로 삼았다. 에이원은 콜릿 척 수주에서 납품까지 보통 하루, 늦어도 3일 안에 끝낸다. 당일 오후 3시까지 들어온 주문의 70%는 그날 안에 제조해 발송한다. 주문 100%를 당일 제조·배송할 수도 있지만 다음날 오전에 일이 없을 것을 고려해 급하지 않은 30%는 남겨둔다. 다른 회사는 보통 1주, 길면 2주 가까이 걸린다. “도면을 보이면 자동으로 제조하는 기계가 에이원정밀에 있다”는 소문이 업계에 돈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우메하라는 “납기에 집착하게 된 이유는 품질과 가격으로는 경쟁하기 힘들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품질 면에선 이미 업계 최고라는 기업이 있었고 가격을 낮춰선 자금력이 풍부한 대기업과의 가격 인하 경쟁에서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직원들 오후 5시30분 ‘조기 퇴근’
품질을 희생한 것도 아니었다. 상황에 따라 경쟁사보다 두 배 많은 시간을 들여 제품을 생산할 때도 있다. 비결은 의외로 간단했다. 낭비되는 시간을 줄이는 것이다. 후추시 본사에서 주문 전화를 받는 즉시 팩스를 야마나시현 공장에 보낸다. 주문을 받고 공장에서 작업에 들어가기까지 5분이 걸리지 않는다. 현장 담당자는 자재 창고에서 재료를 골라 작업을 시작한다. 재료를 갖고 나올 때 허가를 받을 필요도 없다. 빠른 납품 덕에 에이원정밀 거래처는 해외를 포함, 1만3000여곳에 이른다.
에이원정밀은 불황이 와도 판매 가격을 낮추지 않았다. 우메하라는 “한번 낮춘 가격은 경기가 살아나도 다시 올리기 힘들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그렇다고 가격을 올리지도 않았다. 철저한 비용 통제와 생산성 향상을 통해서였다.
비용을 통제한다고 직원을 쥐어짠 것은 아니다. 직원은 모두 정규직이다. 평균 연봉은 타사 대비 100만엔가량 높고, 이익의 20%는 직원에게 돌려준다. 오전 8시30분에 출근해 오후 5시30분에 퇴근한다. 퇴근시간을 철저히 지키는 대신 그날 할 일은 그날 끝내야 한다.
에이원정밀은 2003년 자스닥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마치코바 가운데 최초였다. 우메하라는 2007년 사장 자리를 물려주고 경영자문역으로 물러났지만 여전히 본사로 출근해 업무를 보고 있다. 우메하라는 “기본을 지키는 일은 귀찮고 번거롭지만 그렇게 해야 장기적인 고수익이 가능하다”며 “목에 칼이 들어와도 기본만큼은 반드시 사수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