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숙선 명창이 지난달 17일 전북 남원시 비전마을에 있는 송흥록 명창 생가에서 판소리 ‘흥보가’를 열창하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제공
안숙선 명창이 지난달 17일 전북 남원시 비전마을에 있는 송흥록 명창 생가에서 판소리 ‘흥보가’를 열창하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제공
지난달 17일 전북 남원시 비전마을. 30여가구밖에 살지 않는 조용한 마을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수백명의 방문객으로 왁자지껄했다. 인근 주민뿐 아니라 서울 등 멀리 떨어진 도시 사람들도 단체로 버스를 빌려 마을을 찾았다. 현 대차정몽구재단이 ‘예술세상 마을 프로젝트’의 하나로 연 제2회 남원 비전 거리국악축제를 즐기기 위해서다. 주민과 방문객은 마을 곳곳에서 밤늦게까지 펼쳐진 명창 안숙선, 소리꾼 이자람, 예술단체 절대가인, 더 광대 등의 국악 공연에 흠뻑 빠져들었다.

판소리 동편제 시조로 꼽히는 송흥록 명창 생가에서 ‘흥보가’를 부른 안 명창은 “흥보가 박을 타서 부자가 됐다는 터가 근처에 있다”며 “판소리에 의미가 큰 지역에서 공연하니 관객과 더 공감하며 한마음이 된 느낌”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마을은 ‘판소리의 성지’로 불리지만 마을이 가진 문화 잠재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며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특화된 지역문화 발전에 이바지하게 돼 뿌듯하다”고 덧붙였다.

기업문화재단들이 문화예술을 통한 지역 활성화 사업에 눈을 돌리고 있다. 지역사회 중심으로 메세나 활동을 해온 미국이나 일본 등에 비해서는 초기 단계지만 축제 지원이나 복합문화공간 운영 등을 통해 현지 주민의 문화 향수 기회를 넓히고, 지역의 문화적 가치를 높이는 사례가 점차 늘고 있다.

현대차정몽구재단이 한국예술종합학교와 함께 지난해 시작한 예술세상 마을 프로젝트는 민간재단과 지방자치단체, 주민이 협업해 지역문화를 가꾸고 육성하는 첫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지역이 지닌 유·무형 자산과 예술을 연계해 주민과 관람객이 함께 어울려 축제를 벌이고, 이를 통해 ‘예술마을’의 품격과 가치를 높이는 사업이다.

현대차정몽구재단은 지난해 첫 프로젝트 대상으로 비전마을을 ‘국악마을’, 강원 평창군 계촌리를 ‘클래식마을’로 지정했다. 국악마을에서는 안 명창, 클래식마을에선 첼리스트 정명화 씨를 ‘예술거장’으로 영입해 지난해 4월부터 공연과 축제, 청소년 대상 교육사업 등을 벌여왔다. 다음달 19~21일 열리는 ‘계촌리 클래식 거리축제’에는 정씨와 안 명창의 협연을 비롯해 클래식과 국악의 다양한 융합 무대가 펼쳐진다. 계촌 클래식마을 축제위원장을 맡고 있는 마을주민 주국창 씨는 “지난해 프로젝트를 추진할 때만 해도 농촌에서 클래식이 통할까 걱정했는데, 마을이 점점 바뀌기 시작했다”며 “폐교 직전의 초등학교가 다시 살아나고 지역경제에도 도움이 되는 등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났다”고 설명했다.

GS칼텍스재단은 2012년 모기업의 생산 기반이 있는 전남 여수 주민을 위한 복합문화공간 예울마루를 건립, 운영함으로써 지역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1100억원을 들여 건립한 예울마루는 서울의 주요 공연장 못지않은 시설과 공연으로 전남 문화예술 공연 중심지로 거듭나고 있다. 클래식, 오페라, 국악, 뮤지컬, 연극, 콘서트 등 다양한 공연이 연간 수십 차례 열린다. 지난달엔 뮤지컬 ‘맘마미아’를 공연하는 등 대도시에서만 볼 수 있던 대형 공연도 열고 있다. 2012년 5월 개관 이후 총 관람객이 45만명에 달한다.

예술치료 프로그램 ‘마음 톡톡’, 재능개발 프로그램 ‘희망에너지 교실’을 비롯해 지역 주민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예울마루 객석의 10%는 지역의 문화 소외계층 몫이다. 2014년 서울에서 여수로 이사한 김재윤 씨는 “예울마루는 시내 대부분 지역에서 차로 10~20분이면 닿는 등 접근성이 뛰어나고 주변 환경이 좋아 서울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은 공연을 보고 있다”며 “지역 주민의 문화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라고 말했다.

이충관 한국메세나협회 사업국장은 “지역 마을과 중소 도시를 대상으로 한 메세나는 해당 지역에 관광객을 모으고 문화가치를 높이는 등 다양한 부수 효과가 있다”며 “기업문화재단의 지원이 예술단체나 예술가 중심에서 다양한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어 고무적”이라고 평가했다.

양병훈/선한결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