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호의 데스크 시각] 청렴사회의 전제조건
주사위는 던져졌다. 한국식 접대관행을 개혁하려는 미증유의 실험이 시작됐다. 헌법재판소가 지난달 28일 합헌 결정을 내린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얘기다.

김영란법은 지난해 3월3일 오후 5시18분 국회 본회의에 상정돼 17분 만인 오후 5시35분 가결됐다. 충분한 사전 검증이나 토론 없이 입법됐다는 지적도 있지만 헌법소원 심판청구 이후 1년4개월여 만에 나온 헌재 판결로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 됐다.

과거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웠던 것처럼 법 시행일인 오는 9월28일부터는 상당수 국민들이 김영란법을 숙지해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점차 명확해지겠지만, 아직까지는 처벌 대상이 되는 청탁과 부탁의 경계가 모호하다. 별다른 죄의식 없이 관행처럼 여겨 왔던 식사 및 술자리 접대 문화와 선물·경조사비 수수 관행도 확 바꿔야 한다.

소극 행정으로 가선 안 돼

우여곡절 끝에 시행을 앞둔 김영란법이 성공하려면 무엇보다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가장 걱정되는 것은 공무원의 복지부동(伏地不動)이다. 김영란법이 기본적으로 공무원의 부정을 감시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규제 뒤로 숨는 데 익숙한 공무원들이다. 인허가권을 쥔 공무원이 ‘적극 행정’ ‘소신 행정’을 하지 않으면 기업인을 비롯한 민원인만 죽어난다.

최근 만난 한 공무원은 “김영란법이 시행되면 공무원들이 가급적 민원인을 만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조금이라도 의심받을 일은 피하려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괜한 오해를 사느니 ‘소극 행정’으로 일관하는 ‘몸보신 문화’가 공직사회에 퍼질 우려가 있다는 얘기다.

엉뚱하게 김영란법 적용을 받는 ‘민간인 신분의 공직자’에 대한 배려도 필요하다. 김영란법은 적용 대상을 공무원 외에 공직유관단체, 공공기관 임직원, 언론사 임직원, 사립학교 관계자 등으로 광범위하게 규정하고 있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출자·출연보조를 받는 기관·단체는 물론 재단법인과 병원·의료원, 사회·문화·예술·체육·교육단체 종사자 중에서도 해당자가 적지 않다. 이들 중 ‘갑’의 지위에서 청탁·접대를 받을 만한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일자리 뺏는 부작용 차단해야

김영란법이 호텔 백화점 골프장 한정식집 등에서 일하는 일부 계층의 일자리를 빼앗는 결과를 낳지 않을지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이미 농수축산업계와 화훼농가 등은 생존을 위협받게 됐다며 길거리 시위에 나섰다. 가파른 최저임금 인상과 지나친 비정규직 보호 대책, 어설픈 대형마트 규제 등이 가져온 역설적인 현상들을 반면교사로 삼을 필요가 있다.

김영란법이 사회 불신과 계층 간 위화감을 조장하는 수단으로 변질되는 것도 막아야 한다. 대한변호사협회가 헌재 결정 직후 낸 성명에서 지적한 것처럼 김영란법이 언론통제법, 가정파괴법, 국민불통법, 복지부동조장법이 돼서는 안된다.

김영란법 시행까지 두 달이 채 안 남았다. 법원 판례가 쌓일 때까지 수년간은 모두가 불안하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도 늦지 않았다. 모호하거나 비현실적인 내용은 시행령을 통해 보완하면 된다. 그래야 예상치 못한 혼란이나 억울한 피해자를 줄이고 당초 법 취지도 살릴 수 있다. “일단 시행해 본 뒤 문제가 있으면 그때 가서 고치자”는 말은 무책임하다. 국민들을 ‘마루타’로 삼아서는 안 된다.

이건호 지식사회부장 leek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