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꽃으로 말하기
조그만 한옥으로 옮기면서 명함만한 대문 앞에 화분 몇 개를 놓고 아침마다 물주기를 계속하는 것을 하나의 기쁨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 순간은 마음도 꽃이다. 집을 줄이니 내 행복도 줄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맞는 이야기였다. 텅 텅 빈 행복을 팍 줄여 진정한 행복으로 꽉 차게 했다면 그 행복의 양을 줄이고 질은 높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나는 행복을 줄였다. 그리고 졸여 작은 행복을 터질 듯 팽팽하게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하면 되겠지만 내가 깨달은 것은 다르다. 행복이란 터질 듯 팽팽해 졸도할 만큼 부풀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 나의 질 높은 행복론이다.

못나고 작은 것을 귀하게 볼 줄 아는 행복, 그것이 행복을 누릴 줄 아는 자세라는 것이다. 비스킷만한 작은 한옥 대문 앞에 놓인 화분 앞에서 사진을 찍는 중국인은 하루에도 셀 수가 없다. 계동골목은 수시로 중국인이 드나든다. 게스트 하우스가 많은 계동골목은 관광지라고 부를 수 있다. 나는 그들 외국인에게 한국을 방문한 인사를 드려야 한다. 어찌 그들을 다 만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에게 내 집 앞에서 그들이 찍는 사진 몇 장으로 이 대문의 주인이 “감사합니다” “환영합니다” “한국을 잘 즐기고 가십시오” 등의 인사를 대신하는 것이다.

여름에 꽃으로 말하기
꽃으로 인사하기다. 그래서 내 집안의 꽃보다 집밖의 꽃을 더 조심스럽게 고른다. 그들의 여행 피로를 덜어주거나 한국을 알리는 일이나 북촌을 더 쾌적하게 즐기는 인사를 몇 개의 화분으로 대신하기 위해 고심한다.

꽃을 고르는 기분은 더위를 잊게 한다. 꽃이야말로 여럿이 즐겨야 한다. 물론 내 홀로의 식탁에도 자주 꽃 한송이가 나와 대화를 나누는 친구가 되지만 꽃이야말로 여럿이 꽃을 대상으로 “예쁘다. 예쁘다”를 해주어야 한다. 꽃도 아는 척해 주어야 웃으며 핀다. 그렇게 말해줌으로써 또한 내가 화평해지는 것이다. 내가 화평해지고 내가 행복해지는 일은 모두 내게 달렸다. 줄일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되면 행복에 가까워질 수 있다.

내가 꼬막조개 하나 같은 작은 한옥으로 이사를 왔을 때 존경하는 어느 스님이 좁아서 살겠느냐고 물었을 때 “비워야지요”라고 대답했다. 스님은 이 집의 문패를 공일당(空日堂)이라 하셨고 지금 대문 앞에는 나무에 새긴 공일당이 붙어 있다. 문패는 이름이 아니라 주인의 생각을 담는 것이다. 스님 말씀대로 비우면 다시 쌓인다는 말씀을 내 치졸한 인성이 붙들고는 있을 것이지만 그 문패를 달고도 더 가난하거나 더 부자로도 살지는 않는다. 마음만은 헐렁하게 여유를 가진다면 그것이 행복 아니겠는가.

대문 앞의 꽃을 길 가는 손님들이 지루해 할까 싶어 꽃시장 나들이를 가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내 대문 앞을 지나가는 모든 사람이 꽃을 보고 한 번쯤 웃는다면 그 꽃에게 말을 걸어준다면 이 세상 폭력의 어느 한 귀퉁이쯤 펴지지 않을까, 오늘도 그렇게 생각하며 꽃에 물을 준다. 물을 주며 꽃의 말도 경청하고 향을 음미하면서 이런 집중이야말로 내가 만들어내는 너그러움의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가끔 몸을 찔러 오는 내 생의 상처는 나를 무너뜨리는 힘으로도 오지만 대개는 더 강해지는 극복의 원동력으로 날 일으킬 때가 많다.

그렇다. 꽃 앞에서 더욱 기어이 일어서려는 근력이 생긴다. 공일당은 빈 게 아니라 가득 차는 것이다.

신달자 <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