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소득 2만달러.’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3년 집권 4개월 뒤 국정 목표로 내세운 과제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의 지지 기반이던 ‘386세대’(1960년대 태어나 1980년대 대학을 다닌 운동권 출신 30대)의 거센 반발에 직면했다. 대기업 소속 연구소(삼성경제연구소)의 두뇌를 빌려 나온 성장주의 의제라는 이유에서였다.

10여년 전만 해도 민간 경제연구소는 ‘국가 경제 아젠다’를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국가 정책으로 만들어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경제 및 산업 흐름을 정밀하게 분석해 경제 관료들의 ‘아이디어 뱅크’ 역할을 했다. 이들 연구소에서 펴낸 각종 보고서는 정책을 펴는 관료에게 훌륭한 참고서였다.

하지만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등 수차례 경제 위기를 거치면서 올해로 설립 30년이 된 민간 연구소가 ‘조로(早老) 현상’을 보이고 있다. 그룹 내부 사업 지원을 하는 ‘인하우스 연구소’로 기능이 축소되거나 거시경제 및 산업 트렌드를 분석해 정부 정책을 조언하는 역할이 사라졌다.
일러스트 = 추덕영 기자 choo@hankyung.com
일러스트 = 추덕영 기자 choo@hankyung.com
◆4년 새 보고서 수 21% 감소

민간 연구소 ‘트로이카’ 중 한 곳인 현대경제연구원이 올해(1월1일~8월18일) 내놓은 보고서는 총 105건이다. 한창때인 4년 전 같은 기간(127건)보다 20.9% 줄었다. 연간 기준으로 지난해 낸 보고서 수는 146건으로 2012년(190건)보다 30.1% 감소했다. 작년에만 핵심 연구인력 10여명이 빠져나갔다. 박사급 인력도 5년 새 반으로 줄었다.

[대한민국 국가 브레인이 없다] 서른 살 민간 경제연구소 벌써 '조로(早老) 현상'…"정책 조언할 힘도 없다"
박사급 인력 이탈이 심해지자 한동안은 석사급 인력만 충원하기도 했다. 현대경제연구원의 주 수익모델은 연구용역보다 교육본부에 치우쳐 있다. 민간 연구소 중 사정이 나은 LG경제연구원도 지난해 내놓은 보고서가 총 153건으로 2012년(187건)보다 22.2% 줄었다.

한 민간 연구소 관계자는 “모기업의 지원이 줄다 보니 적은 인력으로 과거와 같은 양질의 보고서를 내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교수직 등 다른 곳으로 옮기려면 연구 성과를 쌓아야 하기 때문에 경쟁적으로 보고서를 내지만 완성도가 높지 않은 편이어서 자괴감을 느끼기도 한다”고 털어놨다.

◆인하우스 컨설팅펌으로 축소

아예 외부 보고서나 경제 전망을 내놓지 않는 민간 경제연구소도 늘었다. 돈도 안되고 ‘잡음’도 많은 거시경제 분석 보고서를 내놓기보다는 대다수 연구인력을 모기업의 주력업종 시장 전망이나 경영전략 등 내부 연구로 돌리는 게 추세다.

국내 최대 민간 연구소인 삼성경제연구소(SERI)가 대표적인 사례다. 삼성경제연구소는 2012년까지만 해도 거시경제뿐 아니라 국제 경제, 산업 및 경영 트렌드 분석에서 국내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다. SERI보고서는 고위 경제 관료는 물론 기업 최고경영자(CEO)의 필독서였다. 하지만 2013년 조직 전체를 삼성그룹 인하우스 연구소로 전환하면서 SERI보고서는 사라졌다. 삼성경제연구소 관계자는 “거시경제 분석 자료는 국제통화기금(IMF) 한국은행 통계청 등 외부 자료를 인용하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외환위기 직후 경제연구소를 해체했다가 2002년 간판을 바꿔 새로 발족한 SK경영경제연구소도 거시경제 분석 기능을 사실상 접었다. 해마다 ‘내년 경제 전망’을 내놓던 대신경제연구소도 2011년 이후 거시경제 전망 기능을 없앴다. 농협은행 산하 농촌경제연구소는 수익성을 이유로 2014년 해체됐다.

◆정책 조언 여력 상실

대다수 민간 연구소의 존립 자체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깊이있는 정책 조언 여력은 상실한 지 오래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지난해 미국 펜실베이니아대가 발표한 세계 싱크탱크 평가 순위에서 한국 민간 경제연구소는 100위권에 한 곳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한 경제부처 공무원은 “2010년 이전까지만 해도 민간 연구소와 협업을 많이 하고 정책을 수립하기 전 수시로 의견을 듣는 분위기가 있었다”며 “지금은 거시 정책에 대한 깊이있는 조언을 듣기 힘들다”고 말했다.

한 민간 연구소 관계자는 “오너의 입김이나 정치권의 외풍, 모기업의 재정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게 현실”이라며 “특히 대기업들이 3세 경영 체제로 바뀌면서 공적 연구기능을 소홀히 하는 현상이 뚜렷하다”고 말했다.

심성미 기자 smsh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