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카이 슈지 한국닛켄 대표는
와카이 슈지 한국닛켄 대표는 "'이만하면 괜찮다'는 식의 적당주의를 일체 허용하지 않은 게 성공 비결"이라고 밝혔다. / 최혁 기자
[ 김봉구 기자 ] “한국에서 30년째 버틴 비결이요? 저는 제품 품질에 있어선 ‘이만하면 괜찮다’가 없어요. 운동선수도 몇십 분의 1초로 승부를 가리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같은 기계쟁이는 몇십 분의 1mm가 중요해요. 회사 직원들도 저한테 세뇌당하다시피 했죠.”

지난 23일 한경닷컴과 인터뷰한 와카이 슈지 한국닛켄 대표이사(77·사진)가 성공 비결을 묻는 질문에 “별 게 없다”며 덧붙인 설명이다. 한국어가 유창했다. 스스로는 별것 아니라고 했지만 일본 특유의 장인정신인 ‘모노즈쿠리(ものづくり)’가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한일경상학회와 한국경제신문 공동 주관으로 22~24일 경기도 오산 한신대에서 열린 제31회 한일경제경영 국제학술대회에서 ‘한일경제인대상’을 수상했다. 심사위원회는 공적서에서 “일본적 경영의 한국 정착에 성공한 대표적 경영자(CEO)”라고 평가했다.

한국닛켄은 오사카에 본사를 둔 중견 기계제조업체 닛켄공작소가 1987년 인천에 한·일 합작으로 설립한 금속 절삭공구 전문업체다. 지난해 166억 원의 매출과 31억 원의 영업이익을 낸 이 분야 1위 히든 챔피언으로 성장했다. 와카이 대표는 창립과 함께 부사장으로 취임해 2002년부터는 대표를 맡아 회사를 이끌고 있다.

한국닛켄의 대표 제품은 툴 홀더(tool holder). 기계장비 중간 연결장치다. 자동차 부품 제조에 필요한 금속 절삭공구를 기계 본체에 연결하는 밀링 척, 머시닝 센터 등이 있다. 국산 제품으로는 이례적으로 한국항공우주산업(KAI)에 납품할 만큼 품질을 인정받았다.

30년째 끈질긴 틈새시장 공략이 빛을 봤다. 창립 초기 본사 제품의 수입창구 역할에 그쳤던 회사는 1990년대 중후반 툴 홀더 가격을 3분의 1로 낮추며 100% 국산화에 성공했다. 지금은 오사카 본사에 역수출할 만큼 기술력을 키웠다.

와카이 대표는 “기계공업의 바탕은 기술력이다. 몇십 분의 1mm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우리에겐 엄청나게 중요하다” 며 “일본인의 특성이라고도 하던데 그건 아니다. ‘제품의 품질에 있어서는 절대 양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민족성이 아니라 기술력의 본질”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목돈을 들여 구입한 기계장비 본체가 정작 자그만 연결장치 하나 때문에 작동하지 않는 상황을 사례로 들었다. 와카이 대표는 “제품이나 업무에 있어서 ‘이 정도면 괜찮다’는 말을 제일 싫어한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이어 “제가 하도 강조하니까 우리 직원들 사고방식도 저처럼 돼버렸다”며 웃어보였다.

일에는 엄격하지만 사석에선 직원들과 가족처럼 지낸다. “OO씨” 호칭은 업무 시간이 끝나자마자 “OO야”로 바뀐다. 그는 직원 90여명의 가족들 안부와 경조사를 줄줄 꿴다. 회사 창립 당시 ‘짧으면 3년, 길어야 5년’을 생각했던 한국 생활을 무려 30년째 이어오는 원동력이다.
지난 23일 한경닷컴과 인터뷰하는 와카이 슈지 한국닛켄 대표. / 최혁 기자
지난 23일 한경닷컴과 인터뷰하는 와카이 슈지 한국닛켄 대표. / 최혁 기자
와카이 대표의 경영철학은 독특하다. ‘시장점유율 50%를 넘지 않는다’는 게 그것이다. 업계에서 알아주는 기술력을 보유했으나 점유율은 35~40% 선을 유지하고 있다. 회사의 특수성 때문이다. 현재 일본 본사는 회사 경영엔 일체 관여하지 않지만 지분을 100% 갖고 있다.

그는 “외국 지분 100% 회사가 시장을 독점하면 욕 먹는다. 선의의 경쟁을 벌이는 국내 업체가 필요하다는 게 저의 철학” 이라며 “우리에게 기술을 배워 경쟁업체로 성장한 곳도 있다”고 소개했다.

한국닛켄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수출도 하지 않는다. 철저히 내수 타깃이다. 무분별한 확장보다는 회사 경영을 견실하게 다지자는 생각에서다. 내부적으로는 직원들을 장인으로 만들어 제품 질을 높이는 방향을 택했다. 와카이 대표는 “한국 기계공업 발전에 필요한 밑거름이 되는 게 우리 회사의 목표”라고 힘줘 말했다.

한국과의 인연은 197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와카이 대표는 당시 공업화에 박차를 가하던 국내에 일본산 공작기계를 수출하는 업무로 처음 한국을 찾았다.

“영부인(육영수 여사)이 조총련계 재일교포 문세광의 흉탄에 숨진 닷새 뒤였다. 반일 감정이 심했지만 설마 잡아 죽이기야 하겠느냐면서 한국에 들어왔다” 고 회상한 그는 “막상 와서 기계 시연을 해보이니 이것저것 궁금한 걸 물어보더라. 한국 사람들의 순수한 열정에 감동받았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오랜 한국 생활은 그가 한일 관계를 되새기는 계기가 됐다. 와카이 대표는 “한국에서 30년째 살면서 직원들에겐 가족애를, 한국과 인천에는 고마움을 갖게 됐다” 며 “과거사는 지우개로 지울 수도 없지 않느냐. 단 우리 세대에서 노력하지 않고선 양국이 미래지향적 관계로 갈 수 없다는 건 확실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닛켄에는 깃발 세 개가 걸려있다. 태극기, 사기(社旗), 시기(市旗)다. 그가 직접 인천시에 제안했다. 이 문화는 회사가 위치한 인천 남동공단 전체로 확대됐다. 인천문화재단과 인천대 등에 사재를 털어 기부하기도 했다. 와카이 대표는 “저는 이곳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긴다. 특별할 것 없는 향토애다”라고 귀띔했다.

오산= 김봉구 한경닷컴 기자 kbk9@hankyung.com
사진= 최혁 한경닷컴 기자 choko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