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기우제
KBS가 1996년 방송한 ‘용의 눈물’은 ‘역대 최고 사극’의 하나로 꼽힌다. 이 드라마는 태종 이방원의 기우제 장면으로 1년6개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병석의 태종은 ‘죽어서라도 옥황상제께 청해 온누리에 비를 내리겠다’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햇볕이 쨍쨍하던 하늘에서 갑자기 굵은 빗방울이 쏟아진다. 음력 5월 초열흘께에 내리는 ‘태종우’의 연원이다.

물리적 자연 현상인 가뭄에 선조들은 종교 문화적으로 반응했다. 기후의례를 제정하고 임금이 주재해 환구단(원구단) 등에서 천제를 지낸 세월이 근 2000년이다. 기암절벽과 탁 트인 바다를 즐길 수 있는 유원지인 부산 태종대도 신라 이후 동래 지역에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는 제단이었다. 규장각에는 인조부터 고종까지 253년간 행한 1811건의 기후의례를 담은 ‘기우제등록’이 전해진다.

기우제가 중단된 적도 있다. 태종에 이어 조선의 네 번째 군왕이 된 세종 때다. ‘성군’답게 미신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었다면 좋으련만, 이유는 실망스럽다. ‘중국의 제후국에 불과한데 어찌 천자의 제를 지낼 수 있겠는가’라는 게 이유였다. 제후가 나서면 하늘이 노해 오히려 비를 안 내려줄 것이란 어이없는 사대의 발로였다.

기우제에 왕이 직접 나선 건 천변재이(天變災異)를 초래한 장본인으로 간주된 때문이다. 부여에서는 가뭄의 책임을 물어 왕을 죽이기까지 했다. 신변 위협에 왕은 ‘폭로의례’로 민심을 달랬다. 기우제가 효험이 없을 때 스스로 벌을 내렸다. 정전(正殿) 대신 불편한 전각으로 거처를 옮기는 피정전은 기본이다. 그래도 안 되면 야외로 나가 땡볕 아래에서 정사를 보는 폭로의례를 자처했다.

기우제 풍습은 한반도 바깥에서도 광범위했다. 게르만족은 처녀를 벗겨 물을 뿌리면 비가 내린다 믿었다. 중세 영국에서는 대기를 흔들어 비를 만들려고 마을 교회의 종이나 큰 북을 모두 울리기도 했다. ‘인디언 기우제’는 꼭 비를 부르는 영험함으로 유명하다. 비결은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이어가는 끈질김이었다.

과학적으로 비를 내리려는 노력은 1947년이 돼서야 성공했다. 하지만 인공적인 조절의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수자원 관리의 중요성도 그래서 부각된다.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보의 효용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지만 해갈에서만큼은 만만찮은 성과를 거뒀다.

한 달 넘게 이어진 기록적인 폭염에 세종 안성 대구 상주 영주 옥천 등 전국에서 지자체장 등이 참여한 기우제 행사가 잇따른다고 한다. 21세기로 진입한 지 오래지만 나라님의 책무에 대한 우리네 무의식은 여전한 듯하다. 혹 가뭄이 더 길어져 폭로의례마저 보게 될까 조마조마하다.

백광엽 논설위원 kecor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