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월화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의 주인공 홍라온. 방송 후 ‘홍라온 메이크업’이 인기를 끌었다.
KBS 월화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의 주인공 홍라온. 방송 후 ‘홍라온 메이크업’이 인기를 끌었다.
조선 순조 시대, 남장여자 홍라온(김유정 분)이 상투를 틀고 갓을 쓴 채 저잣거리를 걷고 있다. 갈색 아이섀도를 꼼꼼히 발라 음영을 준 눈화장과 붉은 입술이 옷차림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지난달 22일 방영을 시작한 KBS2 월화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의 한 장면이다. 방송 직후 여러 뷰티 블로거가 ‘홍라온 메이크업하는 법’이란 글을 앞다퉈 올렸다.

채널을 돌려 고려 시대로 가봐도 상황은 비슷하다. 지난달 29일부터 방송을 탄 SBS 월화 드라마 ‘보보경심 려’에서 고려 태조의 ‘황자’들은 머리 모양에 한껏 멋을 냈다. 이마를 가릴 정도로 기른 앞머리에 ‘볼륨 컬’을 넣거나 ‘2 대 8 가르마’에 상투를 반만 트는 등 제각각이다. 스프레이로 멋 부려 고정한 머리카락은 칼싸움 장면에서도 흐트러짐이 없다. 프로그램 예고편 공개 때부터 ‘고려 왕족들은 모두 미용실 VIP였나’란 우스갯소리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나왔을 정도다.
SBS 월화 드라마 ‘보보경심 려’에서 고려 태조 아들 왕욱과 그의 형제들은 다양한 머리 모양을 선보인다.
SBS 월화 드라마 ‘보보경심 려’에서 고려 태조 아들 왕욱과 그의 형제들은 다양한 머리 모양을 선보인다.
최근 퓨전 사극 붐과 함께 ‘시대 불명, 국가 불명’ 차림을 한 등장인물이 쏟아지고 있다. 시청자의 반응은 엇갈린다. 일부는 ‘특정 시대를 배경으로 설정했다면 최소한의 고증 연출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드라마는 멋진 배우들과 화면 구성이 주는 재미가 최우선’이란 의견도 있다.

한 공중파 방송사의 PD는 “요즘 사극은 특정 사건이나 정쟁이 아니라 로맨스에 집중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며 “대중이 선남선녀들의 사랑 이야기를 보며 감정을 이입하게 하기 위해서는 극 중 커플의 ‘비주얼’에 가장 신경 써야 한다”고 설명했다.

구르미 그린 달빛은 효명세자(박보검 분)와 홍라온이 주인공이다. 여기에 명문가 자제 김윤성(진영 분)이 끼어들어 삼각관계를 이룬다. ‘보보경심 려’도 해수(이지은 분)와 왕소(이준기 분), 왕욱(강하늘 분)의 사랑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해외에서 한류 드라마 수요가 높아진 것도 이유다. 한류 스타를 보기 위해 드라마를 찾는 해외 팬 입맛에는 전통 고증을 그대로 따른 화면보다 좋아하는 배우들의 멋진 모습이 더 당길 것이라는 계산이다.

드라마 제작사의 한 관계자는 “배우 얼굴을 가리거나 쓰기 불편한 소품은 2000년대 초반 이후 잘 사용하지 않는 분위기”라며 “연기 경험이 많지 않은 젊은 스타들은 움직임에 불편을 주는 소품을 썼을 때 많이 힘들어한다”고 귀띔했다.

대표적인 예가 머리에 쓰는 가체와 투구, 수염이다. 평균 4~5㎏에 달하는 가체는 촬영장에서 모습을 감춘 지 오래다. 요즘 사극에서 궁중 여인들은 머리 장식으로 배씨댕기를 하고 나온다. 실제로는 3~4세 유아들이 썼던 장신구다.

사극에서 성인 남성 배우들이 필수로 선보였던 수염 분장은 이제 주인공의 스승이나 극 중 감초 역할을 하는 조연 배우의 몫이 됐다. 붙이고 떼는 데 1시간가량 걸리는 데다 접착제가 독해 피부 염증의 원인이 되고, 주인공의 ‘꽃미남’ 이미지에 손상을 주기 때문이다.

면도해 매끈한 얼굴의 장수들은 화살이 쏟아지는 전장에서도 투구를 쓰지 않는다. 무겁고 불편한 데다 화면에서 얼굴을 가려서다. 지난 3월 종영한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엑스트라 아르바이트를 한 김모씨는 “전투 장면을 찍을 때 지휘관을 맡은 주요 배우들은 상투에 두건 차림으로 나오고, ‘졸’ 역할을 맡은 조연들만 투구를 쓴 채 촬영했다”며 “뭔가 거꾸로 된 것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사극 화면과 실제 역사를 비교한 《조선의 무인은 어떻게 싸웠을까?》(인물과사상사)를 쓴 최형국 씨(수원시립공연단 무예 연출가)는 “투구 없이 장검을 흔들며 말을 타는 드라마 속 무인들의 모습은 멋있을지 몰라도 허구”라며 “엄밀한 고증 없이 제작되는 사극이 역사를 망가뜨린다”고 지적했다.

선한결 기자 alwa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