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초심, 진심, 중심의 옷깃을 여며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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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을 잃지 않고 진심을 다하며
중심을 잡아야 나라 유지되는 법
하나라도 잃으면 흔들려 무너진다
소강석 < 새에덴교회 담임목사 >
중심을 잡아야 나라 유지되는 법
하나라도 잃으면 흔들려 무너진다
소강석 < 새에덴교회 담임목사 >
한 국가의 흥망성쇠는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설민석 씨의 역사강해에 따르면 한 나라의 건국과 망국 사이에는 초심을 지키는 자와 초심을 잃은 자가 있다. 고려는 왕건이 자주와 애민의 초심으로 시작했지만 훗날 권문세족들이 사리사욕만 부리다 망했다. 그들이 백성들을 착취해 소유한 땅은 너무 넓어 말뚝을 박을 수가 없어서 산맥과 개천을 경계로 삼을 정도였다. 그래서 정도전이 민본의 초심으로 이성계를 앞세워 조선을 건국했다. 그러나 다시 사색당파와 붕당정치에 빠져 당리당략 싸움만 하다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초심은 개인에게도 중요하다. 그래서 필자 또한 초심을 지키기 위해 가난하고 배고팠던 올챙이 시절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집에서 쫓겨나 외롭게 고학을 하던 신학교 시절의 눈물과 서러움, 고독의 기도를 목회 저력으로 삼는다. 무등산에 올라가 소나무와 잡목들을 교인들이라고 생각하고 막대기를 마이크 삼아 설교연습을 하던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한다. 간혹 바쁜 목회 일정과 스케줄 때문에 가슴이 식어지고 초심이 둔감해질 때면 양화진 선교사 묘지나 순교자 기념관을 찾아가서라도 다시 가슴을 뜨겁게 데우고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친다.
물론 초심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진심이 있어야 한다. 초심만 앞세우다 보면 자기중심적인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고 남을 위한 배려가 부족할 수 있다. 타인과의 관계성과 진정성이 결여되면 오히려 초심을 빛바래게 할 수 있고, 초심이 초심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하토야마 전 일본 총리를 만났는데, 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무릎을 꿇고 일본의 역사적 과오를 사죄하던 초심과 진심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처럼 상대방을 움직이고 설득하기 위해서는 진심이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 역사를 보면 진심을 잃어서 뼈아픈 비극을 맞은 적이 있다. 임진왜란을 앞두고 통신사절단이 일본을 다녀온 후 서인 쪽에서 먼저 일본이 침략한다고 했다. 그러자 동인인 김성일은 절대로 일본은 침략하지 않을 거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류성룡이 김성일에게 “진짜 일본이 침략을 안 할 것 같냐”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김성일이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분명히 침략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서인이 침략한다고 하는 데 동인이 동의를 해 줘서야 되겠습니까?” 이처럼 조선 관리들이 초심과 진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임진왜란이라는 처참한 비극을 당한 것이다.
그런데 초심과 진심만으로는 안 된다. 초심과 진심을 넘어서 중심이 있어야 한다. 초심과 진심이 근간을 이루지만 때로는 좌우의 중심을 잡아야 한다. 필자 또한 수만명의 교인들을 섬기는 목회를 하다 보니 중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도 여야가 있고 진보와 보수가 있어서 의견충돌을 하고 갈등을 일으킬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지도자가 아무리 초심과 진심이 있어도 중심이 없으면 공동체가 한순간에 흔들리고 무너져 버린다.
현재 우리나라도 사드(THAAD·고(高)고도 미사일방어체계)를 비롯해서 각종 현안을 놓고 갈등하며 출구를 찾고 있다. 이럴 때 자기편에서만 생각하고 당리당략만을 고집하며 비판하면 안 된다. 국가안보에 대한 거시적 안목과 미래의 국익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적어도 정치권은 초심과 진심에 근간해 무엇이 진정으로 국가를 위한 것인가를 생각하며 백년지대계를 세워야 한다. 국가 지도자는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잡고 국가를 경영해야 한다.
한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한 국가의 흥망성쇠는 초심과 진심, 중심을 얼마나 굳건하게 붙잡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어느 것 하나를 잃어버리는 순간 개인의 삶도, 국가도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폭서의 여름도 지나고 어느덧 서늘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세사의 바람 앞에 흐트러진 우리의 초심, 진심, 중심의 옷깃을 여며야 할 때다.
소강석 < 새에덴교회 담임목사 >
초심은 개인에게도 중요하다. 그래서 필자 또한 초심을 지키기 위해 가난하고 배고팠던 올챙이 시절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집에서 쫓겨나 외롭게 고학을 하던 신학교 시절의 눈물과 서러움, 고독의 기도를 목회 저력으로 삼는다. 무등산에 올라가 소나무와 잡목들을 교인들이라고 생각하고 막대기를 마이크 삼아 설교연습을 하던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한다. 간혹 바쁜 목회 일정과 스케줄 때문에 가슴이 식어지고 초심이 둔감해질 때면 양화진 선교사 묘지나 순교자 기념관을 찾아가서라도 다시 가슴을 뜨겁게 데우고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친다.
물론 초심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진심이 있어야 한다. 초심만 앞세우다 보면 자기중심적인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고 남을 위한 배려가 부족할 수 있다. 타인과의 관계성과 진정성이 결여되면 오히려 초심을 빛바래게 할 수 있고, 초심이 초심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하토야마 전 일본 총리를 만났는데, 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무릎을 꿇고 일본의 역사적 과오를 사죄하던 초심과 진심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처럼 상대방을 움직이고 설득하기 위해서는 진심이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 역사를 보면 진심을 잃어서 뼈아픈 비극을 맞은 적이 있다. 임진왜란을 앞두고 통신사절단이 일본을 다녀온 후 서인 쪽에서 먼저 일본이 침략한다고 했다. 그러자 동인인 김성일은 절대로 일본은 침략하지 않을 거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류성룡이 김성일에게 “진짜 일본이 침략을 안 할 것 같냐”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김성일이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분명히 침략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서인이 침략한다고 하는 데 동인이 동의를 해 줘서야 되겠습니까?” 이처럼 조선 관리들이 초심과 진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임진왜란이라는 처참한 비극을 당한 것이다.
그런데 초심과 진심만으로는 안 된다. 초심과 진심을 넘어서 중심이 있어야 한다. 초심과 진심이 근간을 이루지만 때로는 좌우의 중심을 잡아야 한다. 필자 또한 수만명의 교인들을 섬기는 목회를 하다 보니 중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도 여야가 있고 진보와 보수가 있어서 의견충돌을 하고 갈등을 일으킬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지도자가 아무리 초심과 진심이 있어도 중심이 없으면 공동체가 한순간에 흔들리고 무너져 버린다.
현재 우리나라도 사드(THAAD·고(高)고도 미사일방어체계)를 비롯해서 각종 현안을 놓고 갈등하며 출구를 찾고 있다. 이럴 때 자기편에서만 생각하고 당리당략만을 고집하며 비판하면 안 된다. 국가안보에 대한 거시적 안목과 미래의 국익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적어도 정치권은 초심과 진심에 근간해 무엇이 진정으로 국가를 위한 것인가를 생각하며 백년지대계를 세워야 한다. 국가 지도자는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잡고 국가를 경영해야 한다.
한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한 국가의 흥망성쇠는 초심과 진심, 중심을 얼마나 굳건하게 붙잡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어느 것 하나를 잃어버리는 순간 개인의 삶도, 국가도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폭서의 여름도 지나고 어느덧 서늘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세사의 바람 앞에 흐트러진 우리의 초심, 진심, 중심의 옷깃을 여며야 할 때다.
소강석 < 새에덴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