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철환 서울문화재단 신임 대표이사 "PD·교수·작곡가 '끼' 살려 행복한 문화도시 연출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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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력은 다채롭다. 1978년 동북중 국어 교사로 출발해 1983년 MBC PD로 입사, ‘스타 PD’가 됐다. OBS 경인방송 사장, JTBC 제작본부장을 거쳤고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와 아주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가 최근 직장을 또 옮겼다. 서울문화재단은 그의 일곱 번째 직장이다. 주철환 서울문화재단 대표이사(61·사진)를 12일 서울 용두동 서울문화재단에서 만났다. 시종일관 유쾌한 표정과 긍정적인 생각을 보여주는 그는 아직도 자신은 ‘청춘’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방송을 기획·실행하고 시청자 반응을 살피는 방송 PD의 일이 문화재단 일과 굉장히 비슷하거든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방송을 제작하는 게 목표였는데 마당이 훨씬 더 넓어진 셈이지요.”
그는 일찍부터 ‘스타 PD’로 불렸다. 남들은 생각하지 못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일반인이 방송에 나오면 재미없다’고 생각할 때 일반인도 아니라 군인들이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우정의 무대’를 연출했다. 대학생들을 주연으로 내세워 ‘퀴즈 열풍’을 불러일으킨 게 ‘퀴즈 아카데미’였다. 서울문화재단에도 스타 PD의 ‘연출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관점을 불어넣을 예정이다.
새로운 자리가 부담스러울 법도 하지만 그는 “해보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 들뜨고 설렌다”고 했다. 그의 이름에 늘 따라붙는 수식어가 ‘긍정과 행복의 전도사’다. “궁상맞은 이야기 같지만 어린 시절 부모님이 안 계셔서 고모 손에서 자랐습니다. 그런 데서 얻은 게 있는 것 같아요. 불우한 어린 시절이 있었기에 작은 일에도 감사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됐죠. PD가 돼서도 마찬가지였어요. 상황이 어려울수록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작곡가이자 시인이기도 하다. 중학생 때부터 직접 만든 곡이 60여곡, 그중 12곡은 정식 음원으로 발표했다. ‘돌아갈 순 없어도 돌아볼 순 있다’(반성) ‘상 받은 자 옆에는 상처받은 자가 있다’(인생) 등 짧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콕 박히는 시를 쓰기도 했다. 그가 서울문화재단에서 하고 싶은 일은 이처럼 ‘생활문화의 전도사’가 되는 것이다.
“저는 작사, 작곡도 하고 시, 소설도 써요. 많은 사람이 저처럼 ‘생활문화’를 즐길 수 있는 도시를 만들고 싶습니다. 꼭 조수미 씨처럼 잘해야만 노래하라는 법 있나요? 요즘 직장인들은 스트레스를 풀 곳이 술집이나 노래방 같은 곳밖에 없어요. 시민들이 창작의 즐거움, 음악·춤 등 문화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싶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문화는 무엇일까. 중학교 국어 교사였던 그는 전쟁 이후 전통을 부정하고 초현실주의를 추구하는 예술운동인 ‘다다이즘’을 패러디해 ‘더다이즘’을 실현하고 싶다고 했다. “학교와 방송사를 오가면서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자주 만났어요. 저 자신도 ‘성적의 노예’ ‘시청률의 노예’로 살던 때가 있었고요. 우리가 왜 사는지 의문이 들 때 ‘아, 우리가 인간이었지’라는 자각을 되살려주는 게 문화라고 생각해요. ‘더’ 즐겁고 ‘다’함께 행복한 문화 도시를 만드는 것, 그게 제가 생각하는 ‘더다이즘’이에요.”
그는 사람을 ‘적재적소’에 쓰는 것과 함께 ‘적시’에 쓰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최승자 시인의 시 ‘삼십세’ 중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이 온다”라는 구절을 좋아한다는 그는 예순이 된 지금 이 시를 이렇게 비틀어보기도 한다. ‘이렇게 살 수도 있고 이렇게 죽을 수도 있을 때 예순 살이 온다.’
“제가 60대에 이곳에 온 것은 행운인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면 할 수 있는 것이 더 많아지고, 실수도 줄어들거든요. 지금까지의 경험을 살린다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즐거운 문화 도시를 연출해보고 싶어요. PD 시절부터 ‘시청률’(흥행)엔 자신있거든요, 하하.”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방송을 기획·실행하고 시청자 반응을 살피는 방송 PD의 일이 문화재단 일과 굉장히 비슷하거든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방송을 제작하는 게 목표였는데 마당이 훨씬 더 넓어진 셈이지요.”
그는 일찍부터 ‘스타 PD’로 불렸다. 남들은 생각하지 못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일반인이 방송에 나오면 재미없다’고 생각할 때 일반인도 아니라 군인들이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우정의 무대’를 연출했다. 대학생들을 주연으로 내세워 ‘퀴즈 열풍’을 불러일으킨 게 ‘퀴즈 아카데미’였다. 서울문화재단에도 스타 PD의 ‘연출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관점을 불어넣을 예정이다.
새로운 자리가 부담스러울 법도 하지만 그는 “해보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 들뜨고 설렌다”고 했다. 그의 이름에 늘 따라붙는 수식어가 ‘긍정과 행복의 전도사’다. “궁상맞은 이야기 같지만 어린 시절 부모님이 안 계셔서 고모 손에서 자랐습니다. 그런 데서 얻은 게 있는 것 같아요. 불우한 어린 시절이 있었기에 작은 일에도 감사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됐죠. PD가 돼서도 마찬가지였어요. 상황이 어려울수록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작곡가이자 시인이기도 하다. 중학생 때부터 직접 만든 곡이 60여곡, 그중 12곡은 정식 음원으로 발표했다. ‘돌아갈 순 없어도 돌아볼 순 있다’(반성) ‘상 받은 자 옆에는 상처받은 자가 있다’(인생) 등 짧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콕 박히는 시를 쓰기도 했다. 그가 서울문화재단에서 하고 싶은 일은 이처럼 ‘생활문화의 전도사’가 되는 것이다.
“저는 작사, 작곡도 하고 시, 소설도 써요. 많은 사람이 저처럼 ‘생활문화’를 즐길 수 있는 도시를 만들고 싶습니다. 꼭 조수미 씨처럼 잘해야만 노래하라는 법 있나요? 요즘 직장인들은 스트레스를 풀 곳이 술집이나 노래방 같은 곳밖에 없어요. 시민들이 창작의 즐거움, 음악·춤 등 문화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싶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문화는 무엇일까. 중학교 국어 교사였던 그는 전쟁 이후 전통을 부정하고 초현실주의를 추구하는 예술운동인 ‘다다이즘’을 패러디해 ‘더다이즘’을 실현하고 싶다고 했다. “학교와 방송사를 오가면서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자주 만났어요. 저 자신도 ‘성적의 노예’ ‘시청률의 노예’로 살던 때가 있었고요. 우리가 왜 사는지 의문이 들 때 ‘아, 우리가 인간이었지’라는 자각을 되살려주는 게 문화라고 생각해요. ‘더’ 즐겁고 ‘다’함께 행복한 문화 도시를 만드는 것, 그게 제가 생각하는 ‘더다이즘’이에요.”
그는 사람을 ‘적재적소’에 쓰는 것과 함께 ‘적시’에 쓰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최승자 시인의 시 ‘삼십세’ 중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이 온다”라는 구절을 좋아한다는 그는 예순이 된 지금 이 시를 이렇게 비틀어보기도 한다. ‘이렇게 살 수도 있고 이렇게 죽을 수도 있을 때 예순 살이 온다.’
“제가 60대에 이곳에 온 것은 행운인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면 할 수 있는 것이 더 많아지고, 실수도 줄어들거든요. 지금까지의 경험을 살린다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즐거운 문화 도시를 연출해보고 싶어요. PD 시절부터 ‘시청률’(흥행)엔 자신있거든요, 하하.”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