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라면] 가을, 두 손으로 거두어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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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달자 < 시인 >
추석이 지났다. 그러므로 가을이다. 비가 본격적인 가을을 이미 노크했고 우리들은 문을 열었다. 인간의 인내를 시험하듯 불을 뿜어내던 여름도 꼬리를 감추었다. 추석선물은 쌀 대추 과일들이었다. 모두 가을에 거두는 농산물이다. 대추를 한입 베어 물면서, 커다란 배와 사과를 베어 물면서 나는 큰 질문을 받는다.
“너는 무엇을 거두었는가?” 이 질문에 주눅 들 필요는 없다. 한순간 주눅 들다 말고 나는 반격을 가한다. 그래, 살아 있는 것이 거둔 것이지 않은가. 삶이란 바로 농사니까. 조금만 빈둥빈둥해도 잡풀이 돋고 바람을 타고, 별로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날아가는 까치가 쪼아 상품가치를 떨어뜨리는 농사와 무어 다르겠는가. 이대로 그 징그럽게 덥던 여름을 지나 가을 안에 머무르고 있으니 이것도 잘 거둔 추수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나는 나를 보호하는 적당한 긍정을 찾아낸 것이다. 그러나 지난 추석 선물로 귀가 저릿한 품목이 있었는데 그것은 편지였다. 몇 년이 흘렀는지도 모르는 누우런 네잎클로버 하나가 붙여져 있었다.
“거의 보름 칩거한 채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문밖에만 나가도 상처를 입고 사람만 만나도 주눅이 들어 벽을 바라보는 일이 그래도 마음이 편하니까요.”
언젠가 대학의 야간 시 창작 수업을 듣던 여성이었는데 아무런 능력이 없어 이혼을 하면서 딸 하나도 양육권을 포기해야 했던 여성이다. 마흔이 갓 넘었었다. 세월은 흘렀는데 아직 제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때도 내가 말한 것이 기억난다. 딸을 찾는 일, 생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 앉게 하는 일은 강해져야 한다. 무슨 일이건 손에 잡고 죽을 힘을 다해 움직여야 한다. 그것이 딸을 찾는 일이라고 했었는데 ‘그 죽을 힘’을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그가 봄을, 여름을 어떻게 보냈는지 묻고 싶었다. 그렇게 벽만 바라보며 사람을 피해 살았다면 가을에 거두는 것은 참담함뿐일 것이다. 인간의 삶도 계절의 순리와 다르지 않다. 물론 벽앞에 오기까지 숱한 고난과 고통을 직면했을 것이고 포기하고 돌아서는 심장이 멎는 일이 어디 한두 번이었겠는가. 남편이 미우냐 그러면 용서해라 그것만큼 남편을 괴롭히는 것이 없을 것이라고 귀띔도 했었다. 그래도 용서가 안 돼서 그는 모든 일에 손을 놓고 벽앞에 앉아있는 것이리라. 나는 간단한 문자를 보냈다. 물론 그것도 추석선물이었다.
“그대가 무슨 일을 시작했다고 말할 일이 생기면 그때 만나자.” 하늘이 진실로 노오랗던 젊은 시절이 내게도 있었지만 실로 나는 어린아이를 눈앞에서 보면서 벽앞에 앉아있을 시간이 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은 그만큼 거리가 있는 것일까. 그가 가을 하늘을 보기를 나는 원한다. 그 가을 하늘 안에서 들리는 소리를 들었으면 한다. 이 가을을 거두는 것 없이 빈손이거든 이 가을을 가득 채우는 일을 뭐든 시작해야만 앞으로 닥칠 겨울을 지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은 쉴 새 없이 일을 하는데 인간은 그 자연의 변화만 바라본다면 자연을 바라볼 자격조차 없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추락은 그 순간이다.
누우렇게 변색한 네잎클로버를 매만지며 나는 희망을 갖는다. 그래도 그가 ‘행운’에 대해 미련이 있는 것이라고. 행운은 바로 그녀가 일어서는 것이다. 사람을 만나고 부딪히고 사람속에서 다시 사람의 길을 찾는 것이다. 그녀 마음속으로 사진 한 장을 찍어 보낸다. 내게 보낸 네잎클로버의 행운이다. 행운은 유효기간이 없다. 나누면 힘을 받는 것도 행운이다.
신달자 < 시인 >
“너는 무엇을 거두었는가?” 이 질문에 주눅 들 필요는 없다. 한순간 주눅 들다 말고 나는 반격을 가한다. 그래, 살아 있는 것이 거둔 것이지 않은가. 삶이란 바로 농사니까. 조금만 빈둥빈둥해도 잡풀이 돋고 바람을 타고, 별로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날아가는 까치가 쪼아 상품가치를 떨어뜨리는 농사와 무어 다르겠는가. 이대로 그 징그럽게 덥던 여름을 지나 가을 안에 머무르고 있으니 이것도 잘 거둔 추수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나는 나를 보호하는 적당한 긍정을 찾아낸 것이다. 그러나 지난 추석 선물로 귀가 저릿한 품목이 있었는데 그것은 편지였다. 몇 년이 흘렀는지도 모르는 누우런 네잎클로버 하나가 붙여져 있었다.
“거의 보름 칩거한 채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문밖에만 나가도 상처를 입고 사람만 만나도 주눅이 들어 벽을 바라보는 일이 그래도 마음이 편하니까요.”
언젠가 대학의 야간 시 창작 수업을 듣던 여성이었는데 아무런 능력이 없어 이혼을 하면서 딸 하나도 양육권을 포기해야 했던 여성이다. 마흔이 갓 넘었었다. 세월은 흘렀는데 아직 제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때도 내가 말한 것이 기억난다. 딸을 찾는 일, 생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 앉게 하는 일은 강해져야 한다. 무슨 일이건 손에 잡고 죽을 힘을 다해 움직여야 한다. 그것이 딸을 찾는 일이라고 했었는데 ‘그 죽을 힘’을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그가 봄을, 여름을 어떻게 보냈는지 묻고 싶었다. 그렇게 벽만 바라보며 사람을 피해 살았다면 가을에 거두는 것은 참담함뿐일 것이다. 인간의 삶도 계절의 순리와 다르지 않다. 물론 벽앞에 오기까지 숱한 고난과 고통을 직면했을 것이고 포기하고 돌아서는 심장이 멎는 일이 어디 한두 번이었겠는가. 남편이 미우냐 그러면 용서해라 그것만큼 남편을 괴롭히는 것이 없을 것이라고 귀띔도 했었다. 그래도 용서가 안 돼서 그는 모든 일에 손을 놓고 벽앞에 앉아있는 것이리라. 나는 간단한 문자를 보냈다. 물론 그것도 추석선물이었다.
“그대가 무슨 일을 시작했다고 말할 일이 생기면 그때 만나자.” 하늘이 진실로 노오랗던 젊은 시절이 내게도 있었지만 실로 나는 어린아이를 눈앞에서 보면서 벽앞에 앉아있을 시간이 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은 그만큼 거리가 있는 것일까. 그가 가을 하늘을 보기를 나는 원한다. 그 가을 하늘 안에서 들리는 소리를 들었으면 한다. 이 가을을 거두는 것 없이 빈손이거든 이 가을을 가득 채우는 일을 뭐든 시작해야만 앞으로 닥칠 겨울을 지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은 쉴 새 없이 일을 하는데 인간은 그 자연의 변화만 바라본다면 자연을 바라볼 자격조차 없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추락은 그 순간이다.
누우렇게 변색한 네잎클로버를 매만지며 나는 희망을 갖는다. 그래도 그가 ‘행운’에 대해 미련이 있는 것이라고. 행운은 바로 그녀가 일어서는 것이다. 사람을 만나고 부딪히고 사람속에서 다시 사람의 길을 찾는 것이다. 그녀 마음속으로 사진 한 장을 찍어 보낸다. 내게 보낸 네잎클로버의 행운이다. 행운은 유효기간이 없다. 나누면 힘을 받는 것도 행운이다.
신달자 <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