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국회 ‘민생경제특별위원회’ 회의실. 여야 의원들이 “장관은 다 어디 가고 차관들만 왔느냐”며 호통을 치자 경제 관련 부처에서 참석한 차관 네 명이 차렷 자세로 앉아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다른 일정을 핑계로 불참한 장관들을 대신해 불려 온 ‘대타’들이었다. 오전 10시에 시작한 특위는 오후 4시까지 이어졌다. 회의 대부분은 기본적인 사실을 확인하는 질의응답으로 채워졌다. 토론은 한 시간도 안 됐다.
차관=귀는 열고 열심히 움직이되 입은 닫아야 하는 자리
한 경제부처 차관은 “대참했다고 야단맞으며 시작한 회의가 6시간 내내 알맹이 없이 끝나고 회의장을 나설 때면 내가 국사(國事)를 책임지는 정무직 차관이 맞는지 자괴감이 든다”고 말했다.

◆‘고무줄’ 같은 자리

관가에선 이날 네 명의 차관 모습이 대한민국 차관의 역할과 위상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로 꼽힌다. 차관은 한자로는 ‘次官’, 영어로는 ‘deputy minister’다. ‘2인자’ 또는 ‘장관을 대행’하는 자리다.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는 정무직이지만 명확한 역할이 없다. 그래서 과거 기획재정부에서 차관으로 일한 한 관료는 “차관은 고무줄과 같은 존재”라고 했다. 본인 역량에 따라, 또는 장관이 ‘실세 장관’인지 여부에 따라 차관의 역할이 늘어났다 줄었다 한다는 것이다.

2013년 정부가 만든 ‘차관 직무 가이드’에도 차관 역할은 두루뭉술하게 기술돼 있다. ‘장관을 보좌하는 2인자’라면서도 동시에 ‘주요 업무를 실질적으로 주도하는 자리’라며 상충돼 보이는 역할이 나열돼 있다.

하지만 차관을 해본 관료들은 다 안다. 국회 3선급 의원들의 자리를 챙겨주기 위해 발족된 각종 특별위원회에 장관 대신 불려가 깨지거나, 장관이 바빠 가지 못하는 행사에 참석해 축사하는 ‘대독 차관’이 주된 역할이라는 것을.

간혹 장관보다 힘이 강해 ‘왕차관’이란 별명이 붙은 차관들도 있긴 했다. 정권의 ‘줄’을 타고 내려온 ‘낙하산 차관’들로 대부분 단명으로 끝났다.

◆확률 0.014% 별따기지만…

차관급 자리는 모두 88개(청와대 비서관, 검사장 제외)다. 전체 중앙 공무원(62만5835명)의 0.014%에 해당된다.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다. 1급까지는 실력으로 올라갈 수 있지만, 정무직인 차관부터는 실력 못지않게 관운도 따라야 한다. 하지만 차관 자리에 올라도 권한은 많지 않다. 정식 보고라인도 아니다. “국·과장 때는 차관이 되면 할 수 있는 게 많을 것 같았지만, 막상 차관이 돼 보니 오히려 실무 권한을 가진 국장보다 못하더라”(A 전 차관)는 말이 나올 만하다.

각종 회의에 배석하는 것도 차관들로선 피곤한 일이다. B 전 차관은 “미리 짜여진 각본대로 흘러가 승인하고 끝나는 회의에선 대부분 차관들은 허수아비처럼 한마디도 하지 않고 나온다”고 했다. 국정감사나 청문회가 특히 그렇다. 지난 8~9일 국회에서 열린 ‘서별관 청문회’에는 기획재정부 차관(최상목)과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정은보)이 유일호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과 임종룡 금융위원장 옆에 나란히 출석했다. 하지만 이들은 이틀 내내 말 한마디 못한 채 묵묵히 자리만 지켜야 했다. 경제부처 차관을 지낸 C씨는 “차관 자리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귀는 열고 열심히 움직이되 말은 하지 않아야 하는 자리”라고 했다.

◆퇴직 후 ‘실업자’ 신세

‘대리 사과’ ‘대리 출석’ ‘허수아비 회의 참석’ 등으로 ‘영혼 없는’ 차관 자리에서 고생하고 나와도 갈 곳은 마땅치 않다. 기재부처럼 소위 ‘끗발’있는 부처 출신 차관들은 다른 부처의 장·차관으로 이동할 수 있지만, 힘 없는 다른 부처 차관들은 ‘언감생심’이다. 부처 가운데 산하기관을 가장 많이 거느리고 있는 산업부조차 현 정부 들어 퇴직한 네 명 중 KOTRA 사장으로 가 있는 김재홍 전 차관을 제외하고 한진현, 문재도, 이관섭 등 전 차관들은 모두 집에서 쉬고 있다.

차관으로 진급하면서 치러야 하는 기회비용도 크다. 신분이 보장돼 있는 관료들이 정년에 앞서 옷을 벗고 조기퇴직하는 경우 민간의 명예퇴직금과 비슷한 퇴직위로금이 나온다. 1급에서 옷을 벗으면 1억5000만원가량 챙길 수 있다. 반면 차관으로 승진하면 이를 포기해야 한다. 올초 물러난 D 전 차관은 “이런저런 이유로 요즘엔 차라리 1급을 하다가 나가는 게 낫다는 풍조마저 생긴다”며 “차관 자리에 회의를 느낄 때는 장관 제의가 와도 뿌리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김재후/강경민 기자 h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