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작가 존 쿠체(76)의 소설 《추락》의 백미는 모든 것을 잃은 주인공과 그보다 더한 나락에 떨어진 딸이 나누는 대화다. 굴욕적인 상황에 절망하는 주인공에게 딸이 답한다. “그래요, 굴욕적이죠. 그러나 어쩌면 다시 시작하기에는 좋은 지점일 거예요. 밑바닥에서 출발하는 것을 배워야죠.”
MBC 주말드라마 ‘불어라 미풍아’의 중심은 이런 밑바닥에서 다시 출발하는 탈북자들이다. 주인공 미풍(임지연 분)은 한때 북한 최고위 외교관의 자녀로 스위스와 마카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재원. 탈북 중 아버지와 오빠를 잃고 한국에서 어머니와 조카를 부양하다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잃은 밑바닥 신세다. 인권변호사 장고(손호준 분) 덕에 위기를 벗어난 그는 장고가 마카오에서 만난 자신의 첫사랑임을 알고 고통스러워한다.
김일성종합대학 영문과를 나온 교사 출신인 미풍의 어머니 영애(이일화 분)는 마카오 시절 감정이 좋지 않았던 장고의 어머니 금실(금보라 분)이 불편하기만 하다. 금실의 집에 세 들어 사느니 차라리 비를 맞으며 다리 밑에서 기거했을 때가 더 나았다고 오열한다. 마카오에서 ‘꽃제비’(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북한 어린이)였던 지인의 아이를 거둬 가족처럼 지냈다가 배신을 당한 트라우마도 크다.
절망에 빠져 있는 탈북자들에 대한 주변 인물들의 반응은 냉소적이다. 대놓고 ‘찜찜하다’고 이야기할 정도다. 우리 사회가 탈북자들을 보는 시선이다.
연출 기법이 이야기에 흥미를 더한다. 이 드라마의 세트에는 유독 창문이 많다. 이를 통해 딥포커스(모든 곳의 초점을 정확하게 맞추는 촬영 기법)로 현실감을 준다. 미풍이 장고 집으로 이사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거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주인공을 보여주고, 뒤편에 계속 진행 중인 이사 풍경에도 초점을 맞춘다. 덕천 집에서 조카며느리 청자(이휘향 분)가 가사도우미의 눈치를 보며 덕천과 대화하는 장면도 그렇다. 주방에서 일하며 삐죽거리는 가사도우미 모습을 딥포커스로 잡아 극 중 상황에 현실감을 더했다.
탈북과 동시에 생의 나락으로 떨어져 매일 죽을 생각만 하는 미풍과 그의 어머니는 사실 1000억원대 부자인 실향민 덕천(변희봉 분)의 손녀이고 며느리다. 시청자들은 언제 이들이 ‘수직 상승 엘리베이터를 탈까’ 기대하며 바라본다. 지난 18일 8회를 내보내 이제 서막을 벗어난 이 50부작 드라마는 현실감 있는 소재와 신선한 연출로 시청자에게 남다른 시사점을 준다.
평소 북에 두고 온 가족과 고향을 그리워하는 덕천의 마음을 돌리려 안간힘을 쓰던 청자는 왜 만취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불렀을까. 통일이 그만큼 어려운 것이라는 의미일까? 존 쿠체의 해석대로라면 ‘추락은 다시 시작하기 좋은 지점’이다. ‘불어라 미풍아’는 그 시작을 알리는 ‘미풍(微風)’일지도 모른다. 씨앗은 태풍이 아니라 미풍으로 싹터 오르기 때문이다.
이주영 방송칼럼니스트 darkblue888@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