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믹스의 역사는 1976년 동서식품이 아웃도어용으로 원두, 설탕, 크리머를 한데 모으면서 시작됐다. 이름은 ‘맥스웰하우스 커피믹스’였다. 원두를 네모난 작은 봉지에 담은 인스턴트 커피는 이미 다른 나라에서도 유행이었지만 설탕과 크리머까지 함께 담은 제품은 없었다. 커피믹스란 말도 이때 나왔다. 국내 커피믹스 역사 40년. 이제 외국인도 열광하는 제품이 됐다. 예전 KBS 예능프로그램 ‘미녀들의 수다’에 나온 캐나다인 루베이다 씨는 고국에 가져가면 성공할 제품 1위로 커피믹스를 꼽기도 했다. 그는 “원두를 즐겨 마시던 어머니가 이젠 커피믹스만 마신다”며 “집에 갈 때 커피믹스를 꼭 사간다”고 말했다.

‘설탕’ ‘빨리빨리 문화’에 커피믹스 인기

커피믹스가 개발되기 전 국내에서 커피는 ‘다방’이라는 공간에서 소비됐다. 병에 든 인스턴트 커피, 설탕, 액상 크리머를 각각 다른 용기에 담아 기호에 따라 적정 비율을 섞어 마셨다. 일명 ‘다방 커피’라고 불리는 1(커피) 대 2(설탕) 대 2(크리머) 비율은 당시 설탕과 크리머가 귀해 사람들이 더 넣어 마시길 원한 데서 자연스럽게 생긴 것이라는 게 정설로 통한다.

1974년 동서식품은 국내 최초 분말형 크리머인 ‘프리마’ 개발에 성공했다. 이전까진 액상 크리머를 썼는데 보관이 어려웠다. 동서식품 관계자는 “프리마가 없었다면 커피믹스 개발 아이디어도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초 등산과 낚시 등 야외에서 커피를 즐길 수 있도록 하려던 것이 커피믹스 개발 목적이었다. 한국인 표준 입맛에 맞춰 적정 배합비율로 봉지에 담고 포장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이 과정이 어려웠기 때문에 초기에는 시행착오를 겪으며 생산이 잠시 중단되는 우여곡절도 있었다.

동서식품의 커피믹스 배합비율은 40년이 지나도 공개하지 않는 영업 비밀이다. 동서식품 관계자는 “커피, 설탕, 크리머는 당시 다방을 찾던 손님들이 제일 많이 찾는 비율로 배합했다”고만 밝혔다. 커피믹스는 1976년 나오자마자 인기를 끌었다. 인기 요인은 엉뚱한 데 있었다. 설탕이었다. 1970~1980년대는 설탕이 귀하던 시절이었다. 커피업계 한 관계자는 “당시만 해도 설탕을 사기 위해 백화점에 몇백m씩 줄을 섰을 때”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요인은 ‘빨리빨리’ 문화였다. 동서식품 관계자는 “산업화가 이뤄지던 때라 시간의 중요성이 부각됐다”며 “간편하게 커피 한 잔 마실 수 있는 커피믹스가 공사 현장까지도 파고들었다”고 회상했다.

글로벌 커피 기업, 한국 상륙

1980년대 커피믹스 기술은 한 단계 발전했다. 동서식품은 1980년 한국 최초 동결 건조 커피인 ‘맥심’을 내놨다. 동결 건조는 볶은 원두를 건조하는 과정에서 뜨거운 바람으로 말리는 대신 얼린 뒤 압력을 극도로 낮춰 건조하는 방식이다. 고열에 말리는 방식에 비해 커피 맛과 향이 풍부하다는 장점이 있다.

1987년 국내 최초로 스틱형 커피믹스가 나왔다. 스틱형 구조 덕분에 크리머, 커피, 설탕 순서로 포장지 안에 들어가 소비자가 설탕량을 조절할 수 있게 됐다.

1989년 글로벌 거대 커피기업인 네슬레가 한국에 진출했다. 1985년 수입금지품목으로 지정돼 있던 커피류 제품이 수입 감시 품목으로 규제가 한 단계 완화되면서 커피 시장이 외국 커피 기업에 개방되는 계기가 됐다. 이후 한동안 네슬레가 무섭게 한국 시장을 잠식했다. 국내 커피믹스 시장 진출 2년 만에 30%에 가까운 점유율을 기록했고, 5년째 되던 해에는 40%까지 올랐다. ‘테이스터스 초이스 커피믹스’로 한국인 입맛을 사로잡았다.

1990년대 후반에는 커피믹스가 아웃도어 제품에서 사무실과 가정으로 들어오면서 급속한 성장을 이뤘다. 1998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대량해고가 발생하자 직원 스스로 커피를 타 마시는 문화가 확산됐고 냉온수기 설치가 일반화돼 간편하게 마실 수 있는 커피믹스의 인기가 높아졌다. 여성의 사회 참여가 늘면서 회사 내에서 일명 ‘김양’ ‘이양’에게 커피를 타게 하는 문화가 차츰 없어진 것도 커피믹스가 많이 팔린 이유로 꼽힌다.

커피 입맛 고급화에 찬밥신세

지금 판매되는 커피믹스는 커피와 관련된 첨단 기술의 집합체다. 로스팅한 원두에서 직접 커피 향을 잡아내고 저온 추출에서 뛰어난 향만을 선별적으로 회수하는 ‘향 회수’ 공법을 2013년 동서가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이 기술로 원두커피에 근접한 향을 커피믹스에서도 느낄 수 있다는 게 동서식품의 설명이다. 물과 원두가 접촉하는 시간을 최소화해 신속하게 커피를 추출해내는 기술도 여러 업체에서 쓰인다.

커피믹스의 핵심 제조공정은 원두를 말리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제조사별로 맛과 향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동서식품, 남양유업, 롯데네슬레는 동결건조(FD:frozen dryer) 방식을 쓴다. 액상으로 만든 원두를 영하 50도까지 단계적으로 급속히 건조한 다음 140도의 열을 가해 수분은 증발시키고 향은 가둔다. 건조시키는 온도는 업체별로 조금씩 다르다.

서민에게 위로가 됐던 커피믹스의 인기는 점차 사그라들고 있다. 2012년 1조3500억원 규모로 정점을 찍은 커피믹스 시장은 △2013년 1조2800억원 △2014년 1조1500억원 △2015년 1조800억원으로 4년 만에 20% 줄었다. 국내에서 이 시장의 83%를 점유하고 있는 동서식품의 커피믹스 매출도 2013년 9210억원에서 지난해 8067억원으로 12% 감소했다. 동서식품 관계자는 “다양한 종류의 커피를 즐기려는 소비자의 욕구가 반영된 결과”라며 “커피믹스에 함유된 프림과 설탕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 분위기도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노정동 기자 dong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