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한국 원양어업의 카나리아 진출 50주년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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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아프리카 어장의 전진기지 역할
원양어선의 과감한 도전정신 이어받아
해운항만·해양플랜트 시장 개척해야
박희권 < 주스페인 대사 >
원양어선의 과감한 도전정신 이어받아
해운항만·해양플랜트 시장 개척해야
박희권 < 주스페인 대사 >
2014년 말 개봉돼 1500만명 가까이 관람한 영화 ‘국제시장’은 우리 국민에게 과거에 대한 회상과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6·25전쟁 발발, 흥남 철수, 월남 파병 그리고 독일 파송 광부와 간호사들에 대한 얘기는 마음을 적시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대서양 이역만리 스페인령 카나리아 군도와 그 주변 해역에서 격심한 풍랑과 파도를 헤치고 피와 땀을 흘린 원양어선 선원들의 모습이 영화에서 빠진 것은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1966년 5월13일, 한국수산개발공사 소속 제601 강화호가 대서양 스페인령 카나리아 군도 라스팔마스 항구에 닻을 내렸다. 서부아프리카 어장을 향한 어업 전진기지로서 카나리아 군도에 한국어선이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50년 전만 해도 한국은 매우 가난했다. 국민 대부분이 ‘보릿고개’를 겪던 시절,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를 외치며 몸부림친 세월이었다. 당시 우리 선배들은 달러를 벌어 가족을 부양하고 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해외에 간호사나 광부로 나갔다. 이때 대서양 어장을 개척해 가족과 조국에 더 나은 미래를 남겨 주겠다는 일념으로 도착한 곳이 카나리아 군도였다.
망망대해에서 달러를 캐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수개월 이상을 바다에서 조업하면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산더미 같은 파도가 덮칠 때면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사선(死線)을 넘나들어야 했다. 대서양 어장을 개척하면서 많은 선원이 이역만리 바다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바다에서 조업 중에 사고를 당하면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 다행히 시신이 수습된 선원들은 라스팔마스 시내 외곽의 산 나자로 시립묘지나 테네리페 선원묘지에 안장됐다.
“지금 여러분이 겪고 있는 고통은 조국과 후손들에게 보람있는 일을 남겨주기 위한 고귀한 봉사이며 희생입니다.” 1968년 9월 박정희 대통령이 원양어선 선원들에게 한 격려사의 한 구절이다. 이 구절대로 카나리아 군도에 진출한 한국의 원양선원들은 갖은 역경과 시련을 헤치고 우리나라 경제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한국원양산업협회의 통계 자료에 따르면 카나리아 군도 진출 첫해 대서양 선단 8척이 벌어들인 수출액은 252만달러로 당시 한국 전체 수출액의 1%를 차지했다. 이후 20년간 이 지역에서 벌어들인 외화가 8억7000만달러에 달했는데 이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 2만여명이 15년간 한국에 송금한 액수에 상응한다.
카나리아 군도에서의 원양산업이 호황을 누리면서 카나리아 군도의 한인 사회도 발전했다. 1970년대 후반에는 원양어선이 250척, 선원이 8000여명에 달했고 한인사회 동포 수는 1만1000명을 넘었다. 하지만 1982년 유엔 해양법협약에 따른 어장 축소와 조업료 급증, 1990년대 중반부터 작동한 원양어선에 대한 국제 조업감시 시스템 등의 영향으로 대서양 원양산업은 우리에게 시련을 안겼다. 현재 카나리아 군도 내 동포 수는 1000여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한국 어선이 입항하고 나면 부둣가의 게들도 달러를 집게에 들고 다녔다는 이야기는 이제 전설이 됐다.
원양선원의 고귀한 희생 덕분에 국력은 오늘날 이만큼 커졌다. 다행스럽게도 2000년대 이후 원양어업이 국가 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재조명되고 있고, 한국 정부는 2015년 이후 해외 어선원 유해의 국내 이장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우리가 카나리아 진출 50주년을 기념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우선 가족과 나라 발전을 위해 희생한 선배들의 넋을 기리고 불굴의 투지와 개척자 정신을 배우기 위함이다. 나아가 21세기 태평양 시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도전정신으로 해양을 개척해야 한다는 결의를 다지기 위함이다. 우리 정부와 동포들은 대서양의 관문 라스팔마스에서 해상물류, 해양플랜트, 수산양식, 해운항만 분야에서 새로운 프런티어를 개척해 나갈 것이다.
박희권 < 주스페인 대사 >
1966년 5월13일, 한국수산개발공사 소속 제601 강화호가 대서양 스페인령 카나리아 군도 라스팔마스 항구에 닻을 내렸다. 서부아프리카 어장을 향한 어업 전진기지로서 카나리아 군도에 한국어선이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50년 전만 해도 한국은 매우 가난했다. 국민 대부분이 ‘보릿고개’를 겪던 시절,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를 외치며 몸부림친 세월이었다. 당시 우리 선배들은 달러를 벌어 가족을 부양하고 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해외에 간호사나 광부로 나갔다. 이때 대서양 어장을 개척해 가족과 조국에 더 나은 미래를 남겨 주겠다는 일념으로 도착한 곳이 카나리아 군도였다.
망망대해에서 달러를 캐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수개월 이상을 바다에서 조업하면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산더미 같은 파도가 덮칠 때면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사선(死線)을 넘나들어야 했다. 대서양 어장을 개척하면서 많은 선원이 이역만리 바다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바다에서 조업 중에 사고를 당하면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 다행히 시신이 수습된 선원들은 라스팔마스 시내 외곽의 산 나자로 시립묘지나 테네리페 선원묘지에 안장됐다.
“지금 여러분이 겪고 있는 고통은 조국과 후손들에게 보람있는 일을 남겨주기 위한 고귀한 봉사이며 희생입니다.” 1968년 9월 박정희 대통령이 원양어선 선원들에게 한 격려사의 한 구절이다. 이 구절대로 카나리아 군도에 진출한 한국의 원양선원들은 갖은 역경과 시련을 헤치고 우리나라 경제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한국원양산업협회의 통계 자료에 따르면 카나리아 군도 진출 첫해 대서양 선단 8척이 벌어들인 수출액은 252만달러로 당시 한국 전체 수출액의 1%를 차지했다. 이후 20년간 이 지역에서 벌어들인 외화가 8억7000만달러에 달했는데 이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 2만여명이 15년간 한국에 송금한 액수에 상응한다.
카나리아 군도에서의 원양산업이 호황을 누리면서 카나리아 군도의 한인 사회도 발전했다. 1970년대 후반에는 원양어선이 250척, 선원이 8000여명에 달했고 한인사회 동포 수는 1만1000명을 넘었다. 하지만 1982년 유엔 해양법협약에 따른 어장 축소와 조업료 급증, 1990년대 중반부터 작동한 원양어선에 대한 국제 조업감시 시스템 등의 영향으로 대서양 원양산업은 우리에게 시련을 안겼다. 현재 카나리아 군도 내 동포 수는 1000여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한국 어선이 입항하고 나면 부둣가의 게들도 달러를 집게에 들고 다녔다는 이야기는 이제 전설이 됐다.
원양선원의 고귀한 희생 덕분에 국력은 오늘날 이만큼 커졌다. 다행스럽게도 2000년대 이후 원양어업이 국가 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재조명되고 있고, 한국 정부는 2015년 이후 해외 어선원 유해의 국내 이장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우리가 카나리아 진출 50주년을 기념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우선 가족과 나라 발전을 위해 희생한 선배들의 넋을 기리고 불굴의 투지와 개척자 정신을 배우기 위함이다. 나아가 21세기 태평양 시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도전정신으로 해양을 개척해야 한다는 결의를 다지기 위함이다. 우리 정부와 동포들은 대서양의 관문 라스팔마스에서 해상물류, 해양플랜트, 수산양식, 해운항만 분야에서 새로운 프런티어를 개척해 나갈 것이다.
박희권 < 주스페인 대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