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아이] 아름답다, 아름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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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백남기씨 사망진단서, 전문가의 배신
"전문지식 토대로 책임과 교양 갖춰야"
"전문지식 토대로 책임과 교양 갖춰야"
양쪽 색깔이 다른 눈동자란 뜻의 ‘오드 아이(odd-eye)’는 한경닷컴 기자들이 새롭게 선보이는 코너입니다. 각을 세워 쓰는 출입처 기사 대신 어깨에 힘을 빼고 이런저런 신변잡기를 풀어냈습니다. 평소와 조금 다른 시선으로 독자들과 소소한 얘기를 나눠보려 합니다. <편집자 주>
[ 김봉구 기자 ] “아름답다, 아름다워.”
영화 ‘우아한 세계’의 주연 송강호가 연신 중얼거리는 대사인데, 반어법이다. 극중 현실은 (제목과 달리) 전혀 우아하지 않다. 지질한 통속의 삶을 맞닥뜨릴 때마다 특유의 톤으로 무심한 듯 “아름답다, 아름다워”라고 툭툭 내뱉는 게 인상적이다.
11일 국정감사에 출석한 고 백남기씨 주치의 백선하 서울대병원 교수를 보면서 문득 이 대사를 떠올렸다. 그는 백씨의 사망진단서에 외인사가 아닌 ‘병사’로 기록한 사인(死因)을 바꿀 뜻이 없다고 했다. 서울대병원도 주치의 권한임을 강조했다.
서울대병원 교수. 우아한 세계의 주인공에 어울리는 자리다. 직함만으로 경외와 신뢰를 받았음직하다. 다름 아닌 전문성 덕분이다. 전문가를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은 ‘권위자’다. 현대사회는 그들에게 권위를 위임해 반대급부로 전문성을 얻었다. 희소성을 획득한 전문성은 그대로 사회적 권위가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시스템에 균열이 생겼다. 한 장의 사망진단서가 논란이 된 것은 전문가 권위가 사회 일반의 상식과 충돌했기 때문이다. 일반인도 판단 가능한 수준의 사안을 전문가가 부정할 때 권위는 흔들린다. 외압이나 모종의 관계를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 성향이 아닌 책임과 교양의 문제다. 지금은 전문성 그 자체보다 ‘전문지식을 토대로 한 책임의식을 지닌 전문가’가 존중받는 시대다. 황우석 박사를 거치면서 우리는 무책임한 전문성이 얼마나 큰 해악인지 절감했다. 전문가에게 전공분야 칸막이를 뛰어넘는 사회 현안에 대한 보편적 교양이 요구되는 이유다.
백 교수뿐만이 아니다. 옥시레킷벤키저의 가습기 살균제 유해성 연구보고서를 조작해 최근 실형을 선고받은 서울대 조모 교수는 국내 독성학 분야 최고 권위자였다. 전문성 문제가 아니었다. 책임과 교양의 부족으로 말미암은 윤리의 부재가 엄청난 재앙을 초래한 것이다.
기자는 어떤 사안을 취재하며 교수들에게 물어보곤 한다. 해당 분야 전문가라는 믿음 때문이다. 주로 관찰한 현상에 대한 근거나 확신이 필요할 때 전문가를 찾는다. 이들에 대한 신뢰에 취재의 필요성까지 더해져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게 된다.
이제 다시 생각한다. 기자는 그들을 무책임하게 전문가로 호명하지 않았는가. 이해관계가 반영되거나 편향된 그들의 발언을 전문가의 객관적 견해로 소개한 일은 없었는가. 혹은 문제적 판단을 그들에게 위임하고 기자의 역할인 팩트 체크마저 소홀하지는 않았던가.
그저 우아하기만 한 세계는 현실에 없다. “아름답다, 아름다워” 이 대사는 원래 “지랄한다, 지랄을 해”였다고 한다.
기자와 취재원으로서의 전문가는 ‘적대적 공생관계’여야 한다. 아름답기보단 지랄 맞은 편이 마땅한 사이다. 우아한 백조의 자태가 실은 고단한 물밑 노동을 수반하듯, 전문가는 치열하게 성찰하고 기자는 치밀하게 검증해야 비로소 전문성이 신뢰받는 권위로 남을 수 있어서다.
김봉구 한경닷컴 기자 kbk9@hankyung.com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open@hankyung.com
[ 김봉구 기자 ] “아름답다, 아름다워.”
영화 ‘우아한 세계’의 주연 송강호가 연신 중얼거리는 대사인데, 반어법이다. 극중 현실은 (제목과 달리) 전혀 우아하지 않다. 지질한 통속의 삶을 맞닥뜨릴 때마다 특유의 톤으로 무심한 듯 “아름답다, 아름다워”라고 툭툭 내뱉는 게 인상적이다.
11일 국정감사에 출석한 고 백남기씨 주치의 백선하 서울대병원 교수를 보면서 문득 이 대사를 떠올렸다. 그는 백씨의 사망진단서에 외인사가 아닌 ‘병사’로 기록한 사인(死因)을 바꿀 뜻이 없다고 했다. 서울대병원도 주치의 권한임을 강조했다.
서울대병원 교수. 우아한 세계의 주인공에 어울리는 자리다. 직함만으로 경외와 신뢰를 받았음직하다. 다름 아닌 전문성 덕분이다. 전문가를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은 ‘권위자’다. 현대사회는 그들에게 권위를 위임해 반대급부로 전문성을 얻었다. 희소성을 획득한 전문성은 그대로 사회적 권위가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시스템에 균열이 생겼다. 한 장의 사망진단서가 논란이 된 것은 전문가 권위가 사회 일반의 상식과 충돌했기 때문이다. 일반인도 판단 가능한 수준의 사안을 전문가가 부정할 때 권위는 흔들린다. 외압이나 모종의 관계를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 성향이 아닌 책임과 교양의 문제다. 지금은 전문성 그 자체보다 ‘전문지식을 토대로 한 책임의식을 지닌 전문가’가 존중받는 시대다. 황우석 박사를 거치면서 우리는 무책임한 전문성이 얼마나 큰 해악인지 절감했다. 전문가에게 전공분야 칸막이를 뛰어넘는 사회 현안에 대한 보편적 교양이 요구되는 이유다.
백 교수뿐만이 아니다. 옥시레킷벤키저의 가습기 살균제 유해성 연구보고서를 조작해 최근 실형을 선고받은 서울대 조모 교수는 국내 독성학 분야 최고 권위자였다. 전문성 문제가 아니었다. 책임과 교양의 부족으로 말미암은 윤리의 부재가 엄청난 재앙을 초래한 것이다.
기자는 어떤 사안을 취재하며 교수들에게 물어보곤 한다. 해당 분야 전문가라는 믿음 때문이다. 주로 관찰한 현상에 대한 근거나 확신이 필요할 때 전문가를 찾는다. 이들에 대한 신뢰에 취재의 필요성까지 더해져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게 된다.
이제 다시 생각한다. 기자는 그들을 무책임하게 전문가로 호명하지 않았는가. 이해관계가 반영되거나 편향된 그들의 발언을 전문가의 객관적 견해로 소개한 일은 없었는가. 혹은 문제적 판단을 그들에게 위임하고 기자의 역할인 팩트 체크마저 소홀하지는 않았던가.
그저 우아하기만 한 세계는 현실에 없다. “아름답다, 아름다워” 이 대사는 원래 “지랄한다, 지랄을 해”였다고 한다.
기자와 취재원으로서의 전문가는 ‘적대적 공생관계’여야 한다. 아름답기보단 지랄 맞은 편이 마땅한 사이다. 우아한 백조의 자태가 실은 고단한 물밑 노동을 수반하듯, 전문가는 치열하게 성찰하고 기자는 치밀하게 검증해야 비로소 전문성이 신뢰받는 권위로 남을 수 있어서다.
김봉구 한경닷컴 기자 kbk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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