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녹십자의 이례적 고해성사
녹십자가 혈우병 치료제 ‘그린진에프’의 미국 임상시험을 중단하겠다고 13일 발표했다. 그린진에프는 피를 멈추게 하는 응고인자가 선천적으로 부족한 환자를 치료하는 의약품이다. 녹십자는 세계 제약 시장 공략을 목표로 2012년부터 미국에서 임상시험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인구 1만명 중 1명꼴로 환자가 드물게 나타나는 혈우병의 특성상 임상시험에 참여할 환자 모집이 쉽지 않았다. 지난 7월 중국에서 임상시험에 들어가면서 투자비용도 늘어났다. 녹십자 관계자는 “성장 잠재력이 큰 중국 시장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며 “공시 사항은 아니지만 관련 내용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녹십자의 이례적인 고해성사가 제약업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국내 제약업계에 임상 중단을 순순히 털어놓은 사례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한미약품 사태로 제약·바이오산업에 대한 투자자들의 신뢰가 위협받자 투명한 정보 공개로 돌파구를 찾으려는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신약 개발 실패나 포기는 세계 제약산업에 일상적인 일이다. 일반 제조업에선 후발주자가 마케팅이나 자금력 등으로 시장 판세를 뒤집는 일이 적지 않다. 제약업에선 다르다. 국가마다 복잡한 시장 상황과 보험 시스템 때문에 선발주자가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기존 치료제보다 성능이 뛰어나지 못한 약은 설 자리가 없다. 속도전에서 뒤졌다고 판명되면 발빠르게 포기하는 게 최선의 선택인 것이 제약산업이다. 독일 베링거인겔하임이 한미약품의 항암치료제 개발에 수백억원을 투입하고도 1년여 만에 전격 포기 결정을 내린 것은 이 같은 제약산업의 특수성 때문이라는 견해가 많다.

글로벌 제약사들이 자발적으로 임상 실패를 공개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적어도 제약산업에서 실패와 포기는 숨겨야 할 위험요소가 아니라 환자와 투자자가 반드시 알아야 할 기업 정보라는 인식이 밑바탕에 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시작된 제약·바이오기업들의 정보 공개가 반짝 이벤트에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조미현 바이오헬스부 기자 mwis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