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여러분이 한라산에 땀을 뻘뻘 흘리며 힘들게 올라갔는데, 그 꼭대기에 돌로 만들어진 엄청난 공중 도시가 있다면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엽서에서 볼 때는 별것 아니겠지 생각했는데 막상 페루의 마추픽추를 실제로 대면하니 아니었다. 마추픽추 광경의 핵심에는 엽서에서 감지할 수 없는 ‘높이’라는 개념이 들어가 있었다. 밖에서는 절대 침투할 수 없는 해발 2430m(한라산은 1950m)에 잉카 문명의 찬란한 영광이 고스란히 숨겨져 있었다.

‘잉카의 영광’ 마추픽추

마추픽추는 케추아어로 올드 마운틴 즉 ‘늙은 산’이란 뜻이다. 맞은편 산, 늘 엽서에 나오는 뾰족한 산 와이나추는 영 마운틴 ‘젊은 산’이라는 뜻으로, 마추픽추가 더 높아서 산이 더 늙었다고 생각한 잉카인들이 지은 이름이었다. 여기는 왕의 겨울 궁전으로 외부에서는 전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숨겨진 잉카의 비경을 담고 있다.

아침 11시가 조금 넘자, 마추픽추의 너른 대지에 세계에서 모인 관광객들로 가득 찬다. 각양각색의 언어들이 여기저기서 들리며, 왕의 방, 마켓, 운동장, 잉카 테라스, 작물 보관소, 평민 거주지, 식물원 등을 부지런히 관람한다. 자세히 보면 평민인 루나가 사는 집은 우리가 흔히 덕수궁 돌담길 짓는 방식으로 큰 돌과 작은 돌을 적당히 섞어서 만들고, 큰 황금 귀걸이를 착용한 귀족 계급인 오레 호니스와 왕이 거주하는 궁전이나 제사를 지내는 곳은 멋들어진 큰 돌을 빈틈없이 교합한 석조물이 주류를 이룬다. 그리고 잉카 테라스라고 하는 작물을 키우는 계단식 논(한 계단의 높이가 2m나 된다)에는 홈을 파서 수도관을 만들고, 돌에 요철을 내 레고식으로 조합해서 지진에도 무너지지 않게 한다.

산비탈의 잉카 테라스

이 문명을 마주 대하면 깨달을 수 있다. 아직도 수도관에 물이 흘렀다. 잉카인들은 그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상수도 개념, 돌을 다루는 정교한 건축 기술, 천문학, 두개골 천공술, 산사태를 막고 작물을 더 많이 수확하는 농경술 등. 마추픽추에 오면 잉카인들의 문명에 대한 경외감에 압도당한다. 그리고 동일한 의문을 갖게 된다. AD 1200년에 시작해서 1550년까지 지속된 1000만명의 잉카인이 어찌 100여명 남짓한 스페인군에 의해 처절하게 멸망당했을까. 그들은 철과 글이 없었다.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속 체 게바라도 마찬가지의 각성을 한다. 청년은 삼일 낮밤을 쿠스코에서 걸어서 마추픽추에 도착한 뒤, 잉카 문명의 향수에 젖어 그들이 패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철기 문명 즉 ‘총’이라며 남미에서의 진정한 혁명을 꿈꾼다.

혁명을 꿈꾼 청년 체 게바라

그러나 이 젊은 혁명가의 이상과 달리, 작금의 현실은 달랐다. 가이드 로물루는 부인이 3명에 애인이 15명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유쾌한 잉카인의 후예였는데 (농담이었다. 그를 사랑한 여자는 어머니와 여동생뿐이란다) 점점 친해지자 “우리가 이제는 마추픽추를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요? ‘두링고의 땅’이라고 해요”라고 넌지시 말한다. 두링고는 스페인어로 파란 눈이란 뜻이었다.

오후 2시까지 이 땅은 듀링고의 땅이었다. 그러나 끈질기게 남아 있으면, 점점 관광객들이 사라진다. 나는 로물루와 점심 전에 헤어져서 계속해서 마추픽추에 혼자 남아 있었다. 잉카 브리지 가는 길은 조그만 수풀을 지나 북쪽 문의 방명록에 이름을 적고 걸어 가면 15분 정도 걸린다. 길 끝에는 말문이 막히게 아름다운 깎아지른 절벽과 그 사이 위태롭게 매어 달린 잉카인들이 만든 다리가 나왔다. 태양의 문은 왕복에만 2~3시간은 족히 걸렸다.

성경을 귀에 대는 족장

베르나르 헤어조그 감독이 1560년대로 돌아가 스페인 정복자들의 광기 어린 욕망을 묘사한 <아귀레, 신의 분노>란 영화가 있지만, 그것은 스페인군이 독일어를 하는 기이한 영화이기도 했다. 영화 속엔 탐욕에 사로 잡힌 스페인군이 아마존의 족장을 잡아 성격책을 건네 주는 장면이 나온다. 족장은 성경책을 흔들더니,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며 땅에 던져 버린다. 이에 스페인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족장을 살해한다. 그것은 실제로 폭력적이고 압도적인 타자의 문명과 조우하는 잉카의 가장 의미심장한 역사의 한 장면이기도 했다. 영화에선 스페인 군과 아마존의 족장으로 재현되지만 역사에 따르면 잉카의 마지막 왕 아타왈파는 정복자 피사로가 내민 성경을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며 땅에 집어 던졌다고 한다. 피사로는 이를 빌미로 잉카인들과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스페인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스페인군에 금은 빛나는 욕망의 대체물이었지만, 잉카인들에게 금은 모든 것의 시작인 태양을 의미했다. 성경을 내던진 것도 잉카인은 추상적인 신이 아닌 자연에서 보고 들은 것만 믿었기 때문이었다. 금 역시 대지의 아버지가 준 태양의 일부였고, 태양과 신은 모두 높은 곳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하느님은 하늘에서 만나야 한다고 믿은 민족이었다.

하늘의 신을 상징하는 콘도르

그래서 그들은 그들 식의 성경을 만들었다. 마추픽추는 잉카인들의 영혼과 접신하는 파괴되지 않은 비밀의 도시, 잉카의 성소였다. 나는 이곳에 간절히 더 머무르고 싶었다. 내일 다시 와서 마추픽추에 해가 뜨는 것을 보기로 했다. 무엇보다도 관광객들이 아직 오지 않은 혹은 썰물처럼 빠져나간 고즈넉한 텅 빈 풍경이 좋았다. 마당에는 한 그루의 피소나이 나무가 독야청청하게 마추픽추를 지킨다. 이제는 문 닫을 시간이니 나가라고 경비원이 등을 떠민다. 떠날 시간이다. 다시 돌아오기 위해 마추픽추를 떠난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