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기억상실증
요즘 극장가 화제가 ‘럭키’다. 목욕탕에서 넘어져 기억을 잃은 킬러가 뒤바뀐 옷장 열쇠로 인해 무명배우가 돼 벌어지는 해프닝을 그렸다. 일본 영화를 리메이크했지만 진지할수록 더욱 웃기는 유해진 덕에 나흘 만에 관객 200만명을 넘었다. 국내 드라마들이 출생의 비밀, 불치병과 함께 기억상실증을 막장 필수요소로 삼는 것과 비교된다.

기억상실증(amnesia)은 이처럼 외부 충격이나 심인성(心因性) 원인에 의해 기억이 사라지는 증상이다. 뇌진탕 등에 의한 대뇌 기능저하, 노화, 감염, 알코올 중독 등의 결과로 나타난다. 기억상실증 환자는 과거 일은 기억 못해도 IQ는 정상인 게 보통이다. 약하면 건망증이다. 실어증, 사실과 환상을 혼동하는 기억착오, 알코올이 유발하는 코르사코프 증후군도 있다. 치매는 잊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는 상태다.

기억에는 뇌의 해마, 전전두엽, 간뇌 등이 관여한다. 기억상실증 원인으로 뉴런(신경세포) 일부가 새로 교체되면서 기억도 초기화된다는 이론이 최근 주목받고 있다. 뉴런을 연결하는 시냅스가 끊어지면 기억을 저장하는 해마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얘기다. 과음할 때 필름이 끊기는 블랙아웃도 술이 시냅스의 신호전달 기능을 방해한 탓이다.

기억상실증은 무수한 영화의 모티브가 됐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메멘토’(2000)는 아내가 살해된 날의 충격으로 10분 이상을 기억 못 하는 전직 보험수사관을 통해 완벽한 심리퍼즐을 제시한다. 로버트 러들럼의 소설을 각색한 ‘제이슨 본’ 시리즈는 기억을 잃은 첩보원이 자신의 정체를 추적하는 스릴러로 4편까지 나왔다. 니콜 키드먼의 ‘내가 잠들기 전에’(2014)와 드루 베리모어의 ‘첫 키스만 50번째’는 똑같이 하루만 기억하는 여자가 등장하지만 분위기는 정반대다. 미셸 공드리 감독의 ‘이터널 선샤인’(2004)은 아픈 기억만 삭제해 준다는 설정이 화제를 모았다.

신정아 사건 판결문에 인용돼 유명해진 인지부조화도 자의적 기억상실증으로 볼 수 있다. 자기방어, 자기합리화가 지나쳐 ‘내가 그랬을 리 없다’며 자존심이 기억을 굴복시키는 것이다. 자신이 낯설고 유체이탈한 것처럼 느끼는 이인증, 지킬과 하이드 같은 다중인격증도 기억상실과 연관이 있다.

최근 송민순 회고록 파문의 당사자인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해 논란이다. 10년 전 일이니 그럴 수도 있고, 인정하기 어려워서일 수도 있다. 그래서 기록은 기억보다 힘이 세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