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라진 레임덕, 뭘 해야 할지 …" 벌써 동면 들어간 관료들
정부 임기 종료를 1년 이상 앞둔 시점에서 관료사회가 벌써 긴 동면(冬眠)에 들어갔다. 집권 5년차만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레임덕(집권 말 권력누수 현상)’에 관료들은 5년을 주기로 ‘겨울잠’에 들어가는 게 과거 일반적 현상이었다. 하지만 이 정부에선 이른바 ‘비선 실세’ ‘국정 농단’ 의혹으로 국가 전체를 마비 상태로 몰아넣은 ‘최순실 사태’가 터지면서 관료들의 ‘복지부동(伏地不動)’이 1년 일찍 찾아온 것이다.

5년마다 찾아오는 ‘잠수타기’

“관료는 영혼이 없다.” 전직 기획재정부 장관 A씨가 국회의원들 앞에서 한 말이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서 한 의원이 “정권에 따라 왜 정책이 바뀌느냐”고 따져 묻자 자조적으로 던진 표현이다.

A장관의 말대로 관료는 ‘흔들리는 갈대’와 같다. 5년 한시적 정권에 기용된 기술자, 용병에 불과한 만큼 정권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관료 개인 소신이나 철학과 맞지 않으면 자신이 정부를 떠나면 그만이다.

이런 속성 때문에 정부 말기 레임덕이 오면 가장 먼저 납작 엎드리는 부류가 관료사회다. 다음 정권을 누가 잡을지 눈치도 봐야 한다. 대통령의 말발이 먹히지 않은 이유다.

일부 발빠른 관료들은 줄서기에 나선다. 고위 공무원들 사이에 이런 경우가 많다.

소위 ‘끗발’이 있고, 일 많은 부서를 기피하는 것도 이때쯤 나타나는 현상이다. 청와대 파견이 대표적이다. 정부 초기에는 각 부처마다 청와대 파견자를 놓고 경쟁이 치열하다. 청와대에 1년 정도 근무하면 고속승진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 말기엔 서로 기피한다. 전(前) 정부 사람으로 낙인찍힐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다.

극에 달한 관료들의 무기력

최순실 사태 이후 관료들의 무기력은 극에 달했다. 국무총리가 나서 ‘기강 잡기’에 나서지만 일선 공무원들에겐 ‘시늉’으로 읽힐 뿐이다. 황교안 총리는 지난 29일에도 비상 국무회의를 소집했다. 국정이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당분간 장관회의를 매일 열겠다고 했다. 일부 부처는 실·국장 회의를 새벽에 소집해 군기 잡기에 나섰다. 하지만 장관들조차 의욕을 잃기는 마찬가지다.

한 고위 공무원은 “정치권에서 여야 가릴 것 없이 내각 총사퇴 후 중립내각을 구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마당”이라며 “당장 내일 자신들의 운명이 어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장관이라고 일이 손에 잡히겠느냐”고 되물었다.

일선 공무원들의 분위기는 더 심각하다. 한 과장급 공무원은 “중앙부처 공무원들은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국가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며 “한 집안의 가장과도 같은 대통령의 권위와 국격이 동시에 무너질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제정신을 갖고 일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털어놨다.

지난 주말 전국 각지에서 열린 대규모 촛불집회에서 ‘대통령 하야’나 ‘탄핵’ 등의 구호가 터져 나오면서 공무원들 마음의 동요는 더 커지고 있다.

주요 정책도 표류 불가피

관료들의 무기력은 정책 표류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과거에도 그랬다. 이명박 정부 말기인 2012년 기획재정부는 세법개정안에 당시 이슈가 된 소득세율 과세표준 구간을 축소라는 쪽으로 조정하려다 중도 포기하고 다음 정부로 넘겼다. 종교인 과세도 당초 안보다 대폭 후퇴한 안을 발표했다.

전직 차관을 지낸 한 인사는 “현재 추진 중인 조선업 구조조정도 마찬가지”라며 “당초엔 2강 체제로 재편한다는 분위기에서 대우조선까지 안고 가는 지금 체제를 유지하는 쪽으로 기울어진 것도 중요한 의사결정을 다음 정부로 넘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더구나 박근혜 정부 핵심 정책인 창조경제나 경제혁신 3개년 계획 등에까지 ‘비선 실세 개입’ 논란이 일고 있어 정책 추진동력은 급격히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게 관가의 분위기다. 한 중앙부처 국장은 “중앙부처 관료들의 업무는 조직 운영이 절반, 정책 추진이 절반인데 절반가량은 포기한 채 그냥 집행된 예산을 처리하는 수준의 ‘루틴(일상적)’ 업무만 처리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김재후/황정수 기자 h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