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광장에 모인 시민들.
광화문광장에 모인 시민들.
말(馬)이 문제인 시대, 크라잉넛은 할 말이 가장 많은 밴드였다.

록밴드 크라잉넛은 지난 12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 박근혜 3차 범국민행동' 문화제 사전행사 무대에서 피해자를 자처했다. 이유는 말이었다.

이 밴드의 베이시스트 한경록 씨는 "말은 원래 크라잉넛의 것이었다"며 "우리가 이러려고 크라잉넛을 했는지 자괴감이 든다"고 토로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2차 대국민담화를 풍자한 발언에 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크라잉넛은 말로 시작한 밴드다. 1998년 '말달리자'란 곡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크라잉넛의 이름을 대중에 각인시켰다.

이 곡이 수록된 정규 1집 '크라잉넛'은 인디 음반 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10만장이 팔린 앨범이다.

크라잉넛이 철 지난 히트곡을 언급하며 피해자를 자처한 건 '국정농단' 의혹으로 구속된 최순실씨 딸 정유라(개명 전 정유연) 씨 때문이다.

정씨는 이화여대 입학과 학사관리 특혜 의혹을 받고 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 것은 승마선수인 정씨의 체육특기자 전형 특혜 의혹이 시발점이었다.

크라잉넛은 정씨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독일로 말을 달리러 가는 것도 아니고, 이화여대로 달리러 가는 것도 아니다"라며 "청와대로 달려가자"는 말로 정씨와 박 대통령을 정면 겨냥했다. 이후 시작된 공연의 첫 곡은 역시 '말달리자'였다.
사진 최혁 기자
사진 최혁 기자
시민들은 이 곡에서 반복되는 가사인 '닥쳐'를 합창하며 호응했다.

특히 '우리에겐 힘이 없지' 구절에서 시민들은 보다 큰 목소리로 '닥쳐'라고 화답해 의미를 더했다.

18년 전 만들어진 노래가 시간을 뛰어넘어 정씨를 비롯한 이번 사건 관련자들에게 한방 날린 순간이었다.

열기 속에 노래를 마친 크라잉넛은 "여러분들의 촛불로 거짓된 암흑을 태워달라"고 시민들에게 말했다.

전형진 한경닷컴 기자 withmol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