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120년 전 근대 외교 중심지…대한제국의 역사가 뿌리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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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정동
안창모 < 경기대 대학원 건축설계학과 교수 >
안창모 < 경기대 대학원 건축설계학과 교수 >
정동이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외세 침탈의 상징으로 알려진 석조전이 대한제국역사관으로 바르게 자리 잡으면서 대한제국 역사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고, 정동은 근대한국의 중심임이 명확해졌다.
정동이라는 이름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능이 있는 데서 비롯됐지만, 능이 1409년 정릉동으로 옮겨진 뒤 정동은 역사의 뒤안길에 묻혔다.
정동이 역사의 전면에 드러난 것은 개항 이후다. 1876년 개항이 됐다고 하지만, 1882년까지 인천항은 열리지 않았고, 일본 공사관은 도성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1882년 미국과 수교하면서 인천항이 열렸고, 미국에 도성 문도 열렸다. 정동 땅이 제공된 것이다. 이후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벨기에 공사관이 차례로 자리 잡았고 정동은 외교타운이 됐다.
그러나 정동은 외교타운만이 아니었다. 정동에는 지금도 성공회성당과 정동교회, 그리고 구세군중앙회관이 있지만 예전에는 러시아정교회와 가톨릭수녀원도 있었다. 이 정도면 정동이 이 땅에 전래된 주요 외래 종교의 요람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동은 외교타운이었을 뿐 아니라 선교기지였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선교기지는 교회만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초기 교회에서 교육과 의료는 선교에서 매우 중요했다. 미션스쿨인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그리고 이화학당에 설치된 여성 전용병원인 보구여관의 존재는 정동이 선교기지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외교와 선교의 중심이었던 정동은 1897년 대한제국 출범으로 근대사의 중심이 됐다. 조선을 두고 각축을 벌이던 열강 사이에서 주권을 유지하기 위해 대한제국은 벨기에를 모델로 중립국화를 추구했고, 서울에는 근대국가 건설을 위한 각종 도시개조사업이 시행됐다. 그 심장부가 덕수궁이 있는 정동이었다. 한편 예상치 못한 을미사변을 계기로 출범한 대한제국은 충분한 궁궐의 크기를 확보할 수 없었기에 궁궐을 꾸준히 확장했고, 결과적으로 덕수궁은 도시와의 경계가 뚜렷한 경복궁과 창덕궁으로 대표되는 조선의 고궁과 달리 도시와 맞물린 근대 도시궁궐로 자리매김했다.
1910년 대한제국의 주권 상실로 정동의 공사관들이 영사관으로 바뀌어 외교타운 기능은 소멸됐지만, 서양인 거주지 성격은 유지됐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정동 외곽부터 일본 세력이 밀려오더니, 1920년대 말에는 경성재판소(현 서울시립미술관)가 지어졌고, 선원전 터에는 은행 관사와 교육시설이 들어섰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일제강점기에 소비에트연방공화국 영사관으로 바뀐 구 러시아공사관에는 도끼와 망치가 그려진 붉은 깃발이 휘날리기도 했다.
6·25 전쟁으로 구 러시아 공사관은 파괴돼 탑만 남았지만, 외국 공관 덕에 정동은 전쟁 피해로부터 비교적 안전했다. 그러나 도심재개발 사업으로 정동 주변부는 빠르게 바뀌었다. 신문로 쪽 정동 입구에 경향신문사, 태평로변에 코리아나호텔 등 고층 건물이 정동을 에워싸면서 언덕으로서의 정동이 갖던 이미지는 사라졌다. 다행히 근대교육을 열었던 이화학당이 자리를 지키고 있고, 영국과 러시아 대사관, 미국대사관저, 그리고 정동제일교회와 성공회성당 및 구세군중앙회관도 남아 있어 정동은 대한제국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서울의 명소로 빛을 발하고 있다.
이제 개화기의 정서와 근대사의 중심인 정동은 서울 시민이 가장 사랑하는 도심공간이 됐다. 일제강점기의 경성재판소 건물이 서울시립미술관으로 바뀐 것을 계기로 정동 길은 크고 작은 행사로 가득 찬 걷고 싶은 거리가 됐고, 정동 한복판에서는 작은 음악회가 시민들을 맞이하고 있다. 최근에는 대한제국 역사를 중심에 둔 정동 일원의 도시계획이 발표됐고 석조전에 대한제국역사관이 설치된 뒤 대한제국의 역사 현장이 속속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120년 전 을미사변을 극복하고 근대국가로 출범한 대한제국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뿌리였다는 점에서 정동은 명실상부한 근대한국의 중심이었고, 정동 곳곳에 근대사의 현장이 펼쳐져 있다. 발품을 팔아 돌아보는 근대사의 현장에서 고종의 근대국가 건설 의지를 살피노라면, 우리 역사는 우리 몫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일깨워준다. 정동이 품은 역사는 그래서 생생하게 우리에게 살아있다.
정동이라는 이름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능이 있는 데서 비롯됐지만, 능이 1409년 정릉동으로 옮겨진 뒤 정동은 역사의 뒤안길에 묻혔다.
정동이 역사의 전면에 드러난 것은 개항 이후다. 1876년 개항이 됐다고 하지만, 1882년까지 인천항은 열리지 않았고, 일본 공사관은 도성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1882년 미국과 수교하면서 인천항이 열렸고, 미국에 도성 문도 열렸다. 정동 땅이 제공된 것이다. 이후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벨기에 공사관이 차례로 자리 잡았고 정동은 외교타운이 됐다.
그러나 정동은 외교타운만이 아니었다. 정동에는 지금도 성공회성당과 정동교회, 그리고 구세군중앙회관이 있지만 예전에는 러시아정교회와 가톨릭수녀원도 있었다. 이 정도면 정동이 이 땅에 전래된 주요 외래 종교의 요람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동은 외교타운이었을 뿐 아니라 선교기지였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선교기지는 교회만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초기 교회에서 교육과 의료는 선교에서 매우 중요했다. 미션스쿨인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그리고 이화학당에 설치된 여성 전용병원인 보구여관의 존재는 정동이 선교기지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외교와 선교의 중심이었던 정동은 1897년 대한제국 출범으로 근대사의 중심이 됐다. 조선을 두고 각축을 벌이던 열강 사이에서 주권을 유지하기 위해 대한제국은 벨기에를 모델로 중립국화를 추구했고, 서울에는 근대국가 건설을 위한 각종 도시개조사업이 시행됐다. 그 심장부가 덕수궁이 있는 정동이었다. 한편 예상치 못한 을미사변을 계기로 출범한 대한제국은 충분한 궁궐의 크기를 확보할 수 없었기에 궁궐을 꾸준히 확장했고, 결과적으로 덕수궁은 도시와의 경계가 뚜렷한 경복궁과 창덕궁으로 대표되는 조선의 고궁과 달리 도시와 맞물린 근대 도시궁궐로 자리매김했다.
1910년 대한제국의 주권 상실로 정동의 공사관들이 영사관으로 바뀌어 외교타운 기능은 소멸됐지만, 서양인 거주지 성격은 유지됐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정동 외곽부터 일본 세력이 밀려오더니, 1920년대 말에는 경성재판소(현 서울시립미술관)가 지어졌고, 선원전 터에는 은행 관사와 교육시설이 들어섰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일제강점기에 소비에트연방공화국 영사관으로 바뀐 구 러시아공사관에는 도끼와 망치가 그려진 붉은 깃발이 휘날리기도 했다.
6·25 전쟁으로 구 러시아 공사관은 파괴돼 탑만 남았지만, 외국 공관 덕에 정동은 전쟁 피해로부터 비교적 안전했다. 그러나 도심재개발 사업으로 정동 주변부는 빠르게 바뀌었다. 신문로 쪽 정동 입구에 경향신문사, 태평로변에 코리아나호텔 등 고층 건물이 정동을 에워싸면서 언덕으로서의 정동이 갖던 이미지는 사라졌다. 다행히 근대교육을 열었던 이화학당이 자리를 지키고 있고, 영국과 러시아 대사관, 미국대사관저, 그리고 정동제일교회와 성공회성당 및 구세군중앙회관도 남아 있어 정동은 대한제국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서울의 명소로 빛을 발하고 있다.
이제 개화기의 정서와 근대사의 중심인 정동은 서울 시민이 가장 사랑하는 도심공간이 됐다. 일제강점기의 경성재판소 건물이 서울시립미술관으로 바뀐 것을 계기로 정동 길은 크고 작은 행사로 가득 찬 걷고 싶은 거리가 됐고, 정동 한복판에서는 작은 음악회가 시민들을 맞이하고 있다. 최근에는 대한제국 역사를 중심에 둔 정동 일원의 도시계획이 발표됐고 석조전에 대한제국역사관이 설치된 뒤 대한제국의 역사 현장이 속속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120년 전 을미사변을 극복하고 근대국가로 출범한 대한제국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뿌리였다는 점에서 정동은 명실상부한 근대한국의 중심이었고, 정동 곳곳에 근대사의 현장이 펼쳐져 있다. 발품을 팔아 돌아보는 근대사의 현장에서 고종의 근대국가 건설 의지를 살피노라면, 우리 역사는 우리 몫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일깨워준다. 정동이 품은 역사는 그래서 생생하게 우리에게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