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대구 서문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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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대구 달성공원과 큰장 네거리 옆에 있는 대규모 전통시장. 조선시대 경상감영의 서쪽 문밖에 있다 해서 서문시장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 전엔 대구읍성 북문에 있었다. 임진왜란 후 관찰사가 기거하는 감영이 생길 때 서문으로 이전했고, 일제 때인 1922년 공설시장으로 지정되면서 지금의 자리에 터를 잡게 됐다.
조선 후기엔 삼남(충청, 경상, 전라) 최대 시장이자 평양장·강경장과 함께 3대 시장으로 불리며 교역 중심지로 이름을 날렸다. 6·25의 폐허를 딛고 대구에서 직물과 섬유 산업이 발전하자 포목 도·소매상이 몰렸고 전국 최대 시장으로 급부상했다. 이곳이 물류와 상업 중심지가 된 것은 무엇보다 교통의 편리함 덕분이었다. 낙동강을 통해 경상도의 물자와 남쪽의 해산물 등이 이곳으로 수송됐고, 철도 개설 후 일본에서 들어온 물자까지 모이면서 상업 요충지가 됐다. 대구가 영남 지방의 정치·경제적 허브 역할을 맡았다는 점도 작용했다.
더 결정적인 요소는 대동법이었다. 갖가지 특산물로 나라에 내던 공물을 쌀로 통일하게 됐으니 쌀 거래가 그만큼 늘었다. 대동법으로 납세 시스템이 바뀌고 쌀이 주요한 화폐 기능을 하면서 서문시장은 급성장했다. 시장이 서는 날은 영남 지역뿐만 아니라 서울, 평양, 전주, 광주 등 팔도 상인들이 찾아들었고 객주마다 보부상들이 넘쳤다.
1938년 삼성 창업자 이병철이 삼성상회를 연 곳도 이 부근이다. 국수 뽑는 제면기 소리가 밤새도록 돌아가던 이곳이 국수골목으로 유명해진 것도 이런 까닭이다. 요즘은 칼국수와 수제비를 섞은 칼제비까지 인기를 끌고 있다.
서문시장 인근에는 남문시장과 김광석 거리로 유명한 방천시장이 있다. 국내 최고 약재시장인 대구약령시도 그 옆에 있다. 서문시장의 점포는 4000여 개, 상인은 2만여 명에 이른다. 대구도시철도 3호선 개통과 전국 최대 규모 야시장, 글로벌 명품 프로젝트까지 합쳐 관광명소로도 이름났다.
명성만큼 시련도 많았다. 전쟁 중인 1952년을 비롯해 1960년, 1961년, 1967년, 1975년 대형 화재를 겪었다. 2005년에도 전기합선으로 추정되는 큰불이 났다. 어제 또 화마를 입었다. 잦은 불로 보험료가 올라 화재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상인이 많다니 더욱 안타깝다. 연말 특수 기대감에 부풀었다가 밤중에 날벼락을 맞게 됐으니 그들 심정이 오죽할까.
하루빨리 복구해서 재기하길 비는 마음 간절하다. 60여년 새 일곱 번이나 불타고도 다시 일어선 ‘오뚝이 정신’이면 못할 게 없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조선 후기엔 삼남(충청, 경상, 전라) 최대 시장이자 평양장·강경장과 함께 3대 시장으로 불리며 교역 중심지로 이름을 날렸다. 6·25의 폐허를 딛고 대구에서 직물과 섬유 산업이 발전하자 포목 도·소매상이 몰렸고 전국 최대 시장으로 급부상했다. 이곳이 물류와 상업 중심지가 된 것은 무엇보다 교통의 편리함 덕분이었다. 낙동강을 통해 경상도의 물자와 남쪽의 해산물 등이 이곳으로 수송됐고, 철도 개설 후 일본에서 들어온 물자까지 모이면서 상업 요충지가 됐다. 대구가 영남 지방의 정치·경제적 허브 역할을 맡았다는 점도 작용했다.
더 결정적인 요소는 대동법이었다. 갖가지 특산물로 나라에 내던 공물을 쌀로 통일하게 됐으니 쌀 거래가 그만큼 늘었다. 대동법으로 납세 시스템이 바뀌고 쌀이 주요한 화폐 기능을 하면서 서문시장은 급성장했다. 시장이 서는 날은 영남 지역뿐만 아니라 서울, 평양, 전주, 광주 등 팔도 상인들이 찾아들었고 객주마다 보부상들이 넘쳤다.
1938년 삼성 창업자 이병철이 삼성상회를 연 곳도 이 부근이다. 국수 뽑는 제면기 소리가 밤새도록 돌아가던 이곳이 국수골목으로 유명해진 것도 이런 까닭이다. 요즘은 칼국수와 수제비를 섞은 칼제비까지 인기를 끌고 있다.
서문시장 인근에는 남문시장과 김광석 거리로 유명한 방천시장이 있다. 국내 최고 약재시장인 대구약령시도 그 옆에 있다. 서문시장의 점포는 4000여 개, 상인은 2만여 명에 이른다. 대구도시철도 3호선 개통과 전국 최대 규모 야시장, 글로벌 명품 프로젝트까지 합쳐 관광명소로도 이름났다.
명성만큼 시련도 많았다. 전쟁 중인 1952년을 비롯해 1960년, 1961년, 1967년, 1975년 대형 화재를 겪었다. 2005년에도 전기합선으로 추정되는 큰불이 났다. 어제 또 화마를 입었다. 잦은 불로 보험료가 올라 화재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상인이 많다니 더욱 안타깝다. 연말 특수 기대감에 부풀었다가 밤중에 날벼락을 맞게 됐으니 그들 심정이 오죽할까.
하루빨리 복구해서 재기하길 비는 마음 간절하다. 60여년 새 일곱 번이나 불타고도 다시 일어선 ‘오뚝이 정신’이면 못할 게 없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