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향기] 우연한 곳에서 만난 인생의 선배들
지난 11월 우연한 곳에서 인생의 선배(先輩)로 모실 만한 두 분을 만났다. 통상 학교나 직장의 선임을 선배라 부르지만,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앞선 사람을 부르는 명칭의 뜻 역시 갖고 있으니 그 분들을 내 인생의 선배로 삼는 것도 틀린 일은 아닐 것이다.

한 선배는 얼마 전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독주회를 열었다. 15년 만에 새 앨범을 낸 기념으로 연 이번 독주회는 연주시간만 2시간이 넘는 공연이었는데, 더 놀라운 것은 말 그대로 ‘독주회’였다는 점이다. 너른 콘서트홀에 바이올린 한 대를 들고 나온 68세의 거장은 홀로 우뚝 서서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전곡을 연주했다. 무대 바닥을 단단히 두 발로 고정한 채 활을 들어올리는 순간, 숨조차 쉴 수 없는 적막 속에서 아름답고 깊고 놀라운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팸플릿에 쓰인 문구 그대로 ‘온 영혼을 바쳐 도전하는 바흐’ 그 자체였다. 그간의 삶과 모든 것을 바쳐 도전하는 연주자의 영혼이 객석에 그대로 전달됐다. 처음 바흐를 연주한 지 55년 만에 내는 앨범이라 했다. 언젠가 녹음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다고. 하지만 55년간 한 번도 바흐를 연주하겠다는 생각을 잊은 적은 없다고도 했다. 갑작스러운 손가락 부상으로 연주를 할 수 없어 한때 은퇴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다시 돌아와 무대 위에 선 그 선배의 이름은 정경화다.

그날의 공연은 연주의 감동을 넘어선 뭔가를 내게 줬다. 바이올린을 켠 지 63년. 업종을 떠나 경력으로 비교하자면 이제 16년차인 나는 까마득한 후배다. 앞으로 47년을 더 매진해야만 선배의 경지에 다다를까 싶은 그저 ‘애송이’에 불과하다. 돌아오는 길, 문득 1주일 전 알게 된 또 다른 선배가 떠올랐다. 그분은 올해 수능 최고령 응시자 79세 김정자 할머니다. 전쟁 통에 중학교를 진학할 수 없었던 것이 평생 아쉬워 2013년부터 다시 학교를 다니고 계신다고 했다. 수능이 항상 궁금해서, 대체 얼마나 어려운지 궁금해 시험을 봐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하셨다.

그 선배의 얼굴이 떠오른 건 인터뷰에 응하시던 선배의 얼굴이 너무 젊고, 밝고, 맑았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일을 멈추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그치지 않는 사람의 얼굴이 어떻게 빛나는지 그때 알았다. 앞선 정경화 선배의 얼굴도 그러했다. 정경화 선배 인터뷰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쉰, 예순이 되며 생각하는 한 가지는 하는 것이 안 하는 것보다 1만배는 낫다는 것, 어릴 때 완벽주의자라 거절한 것을 후회한다. 이번 바흐는 못할 것을 그래도 해봐야겠다고 생각한 것. 그래서 마음이 편하다.” 후배들에게 신신당부하는 선배의 말처럼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우리는 ‘내 주변에 선배가 없다. 내게 귀감이 되고 영감을 주는 선배도, 어른도 없다’고 생각하곤 한다. 16년차 애송이 주제에 나도 그런 투정을 부리곤 했다. 그런데 조금 더 주의 깊게 주위를 둘러보니 내게 가르침을 일러주는 인생 선배들이 곳곳에 변함없는 모습으로 서 계셨다. 연말연시를 앞두고 기대를 품게 하는 좋은 영화와 공연이 많이 선보인다. 잠시 복잡한 머리를 식힐 겸 무엇이든 지금 예매해보면 어떨까. CD나 TV로는 느낄 수 없는 현장의 생생함 속에서 모두가 소중한 영감을 얻었으면 한다. 또 모른다. 인생에 소중한 것을 일러주는 좋은 선배 한 분을 만나게 될지 말이다.

이윤정 < 영화전문마케터·퍼스트룩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