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말 국내 한 가전기업은 컨설팅회사로부터 충격적인 보고를 받았다. 가전산업의 미래가 어두우니 비중을 줄이라는 내용이었다. 프리미엄 시장에서 미국과 유럽 회사를 따라잡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중국의 저가 공세를 막을 방도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 보고는 한동한 유효한 듯했다. 삼성전자와 LG전자 매출에서 냉장고와 세탁기, 에어컨 등 생활가전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줄었다. 한국 가전업계는 그 우려를 이겨냈다. 글로벌 프리미엄 시장에 안착했고, 중국과는 여전히 격차를 유지하고 있다. 한때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생활가전이 한국 전자업계를 지탱하는 버팀목이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올해의 성과는 남다르다.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생활가전 사업부문은 모두 사상 최대 실적을 눈앞에 두고 있다. ‘생활가전 르네상스’가 도래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중국 저가공세 뚫고…한국 '생활가전 르네상스'
사상 최대 실적 삼성·LG 가전

올해 LG전자 생활가전(H&A)사업본부의 연간 영업이익은 사상 최초로 1조원을 돌파할 전망이다. 1~3분기 누적 영업이익만 해도 이미 1조1843억원이다. 업계 일각에서는 1조5000억원 규모의 연간 영업이익이 가능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연간 영업이익률도 8% 수준을 기록할 것이라는 게 증권업계 예상이다. 1~3분기를 기준으로 할 때 생활가전부문이 낸 영업이익은 같은 기간 LG전자 전체 영업이익(1조3730억원)의 86% 수준이다. 올해 LG전자를 생활가전부문이 먹여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얘기다.

올해 매출 기준 세계 2위 가전업체로 발돋움할 가능성도 높다. 동부증권은 1~3분기 LG전자 H&A사업본부가 매출 기준으로 스웨덴 일렉트로룩스를 제쳤다고 분석했다. 4분기 전망치를 포함해도 LG전자 H&A사업본부가 147억7400만달러, 일렉트로룩스는 135억3200만달러를 기록할 것이라고 동부증권은 예측했다. 지난해까지는 미국 월풀과 일렉트로룩스가 나란히 1, 2위를 차지했다. LG전자가 매출 기준 세계 2위에 올라서게 되면 창사 이후 처음이다.

삼성전자 소비자가전(CE)부문도 올해 1~3분기 2조3100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4분기를 빼더라도 사상 최대였던 2009년(2조8500억원) 후 최고 실적이다. 4분기에 5400억원 규모의 영업이익만 내도 사상 최대 기록을 갈아치운다. 삼성전자 CE부문에는 생활가전사업부 외에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 의료기기사업부 등의 실적도 포함된다. 이 때문에 TV와 의료기기 등을 뺀 순수 생활가전 분야 실적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생활가전이 올해 CE부문 실적 개선을 이끌었고, 예년보다 나은 실적을 기록한 것은 사실이라는 게 삼성전자 관계자의 설명이다.

삼성전자는 미국 생활가전 분야 시장 점유율 1위도 눈앞에 두고 있다. 미국 시장조사기관 트랙라인이 집계한 시장 점유율 조사에서 2분기와 3분기에 1위를 차지했다. 3분기 삼성전자의 시장 점유율은 18.8%였고, 2위 미국 월풀은 16.3%였다. 현재 추세가 이어진다면 미국 시장 진출 이후 최초로 연간 시장 점유율 1위를 할 가능성이 높다.

싸우면서 성장한 삼성과 LG

삼성전자와 LG전자는 모두 생활가전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가전산업 위기론에 시달려야 했다. 글로벌 가전업체를 따라잡기가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거기다 중국 업체들이 뛰어들면서 ‘샌드위치 위기론’이 더해졌다. 업계 내부에서도 가전산업을 접어야 한다는 주장이 여러 차례 나왔다.

그러나 가전산업 위기론은 사라진 지 오래다. 전자업계에서는 △끊임없는 기술 개발 △프리미엄 전략 △잇단 혁신제품 출시 등이 2016년 생활가전 르네상스를 이끌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삼성전자와 LG전자가 경쟁을 거듭하면서 실력을 키웠다는 해석도 있다.

두 회사는 2013년부터 끊임없이 치고받았다. 2013년에는 냉장고 용량을 놓고, 2014년에는 프리미엄 청소기를 두고 경쟁했다. 지난해부터는 세탁기와 에어컨이 핵심 전장이 됐다. 이 과정에서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혁신제품이 쏟아졌다. LG전자는 드럼세탁기와 통돌이세탁기를 결합한 ‘트윈워시’를 내놨고, 삼성전자는 빨래를 세탁 중간에 추가할 수 있는 드럼세탁기를 선보였다. 삼성전자는 바람 없는 에어컨을, LG전자는 사람을 따라다니며 냉방하는 에어컨을 출시했다.

프리미엄 제품을 두고도 경쟁은 이어졌다. LG전자가 최상위 프리미엄 브랜드 ‘LG 시그니처’로 공세를 펼쳤고, 삼성전자는 프리미엄 냉장고 셰프컬렉션 등으로 응수했다. 가전업계 관계자는 “프리미엄 제품은 중저가 제품에 비해 더 많은 이익을 낼 수 있어 회사의 영업이익률을 끌어올리는 1등 공신”이라며 “동시에 회사 브랜드 전체를 고급화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도병욱 기자 dod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