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훈 기자 khshin@hankyung.com
신경훈 기자 khshin@hankyung.com
국내 최초의 한글 워드프로세서인 ‘아래아한글 1.0’이 1989년 발표된 데 이어 이듬해 출범한 한글과컴퓨터는 ‘벤처 1호’ 기업으로 손꼽힌다. 세계 시장을 장악한 마이크로소프트(MS) 오피스에 맞서 국산 소프트웨어(SW)의 자존심을 지켜낸 곳이다. 한컴은 2010년 취임한 김상철 회장의 리더십을 앞세워 글로벌 기업 도약을 꿈꾸고 있다.

“한국의 칭기즈칸 되겠다”

한컴은 김 회장이 경영권을 인수하기 전 여덟차례나 주인이 바뀌며 풍파를 겪었다. MS의 아성에 가려 미래는 보이지 않았고 직원들의 사기도 바닥을 쳤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김 회장은 한컴을 인수한 뒤 직접 1분20여초 분량의 동영상을 만들었다. “집안을 탓하지 마라. 나는 7살 때 아버지를 잃었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었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쥐를 잡아먹을 만큼 가난했으며 글도 몰랐던 작은 소년이었지만 불굴의 의지로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할 수 있었던 칭기즈칸의 일대기를 담았다.

한컴 관계자는 “처음엔 동영상을 틀자마자 흘러나오는 드라마 칭기즈칸 주제가에 직원들이 ‘빵 터진’ 게 사실”이라면서도 “어떤 위기도 극복할 수 있다는 김 회장의 메시지를 회사 안팎에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영업맨 출신인 김 회장은 취임 초부터 글로벌 시장 진출에 사활을 걸었다. 김 회장은 지난해 말 한경과의 인터뷰에서 “MS가 장악한 시장의 5%만 확보해도 매출 1조원은 충분히 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올해 초에는 26년간 축적한 오피스 SW 기술력을 집약해 비장의 무기인 ‘한컴오피스 네오(NEO)’를 내놨다. 기존 MS오피스와 호환할 수 있고 영어 중국어 일본어 스페인어 아랍어 등 10개 국어 대상 기계 번역 서비스를 제공한다.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PDF파일을 편집 가능한 문서로 자동 변환하는 기능도 갖췄다. 그럼에도 MS 제품과 비교해 가격을 개인용은 약 27%, 기업용은 약 70% 수준으로 낮췄다.

한컴은 MS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중국 중남미 인도 러시아 중동 등 5대 거점을 집중 공략하고 있다. 최근 러시아의 아스비스, 인도 레디프 등과 잇따라 한컴오피스 네오 공급 계약을 체결하는 등 조금씩 결실을 맺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주도

지난 8월 한컴 임직원 120여명은 버스 4대를 대절해 대전에 있는 전자통신연구원(ETRI)을 방문했다. ETRI가 갖고 있는 원천기술을 사업화하기 위한 취지에서다. 이후 한컴은 ETRI와 손잡고 4차 산업혁명 핵심기술 협력 사업을 추진하기로 하고, 여기에 120억원을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인공지능(AI), 증강현실(AR)·가상현실(VR), 임베디드, 사물인터넷(IoT), 교육콘텐츠 분야를 5대 전략 분야로 선정해 관련 기술 개발에 착수했다.

한컴은 이미 ETRI와의 협력을 통해 지난 7월 음성인식 자동 통번역 앱(응용프로그램)인 ‘지니톡’을 선보였다. 지니톡은 한국어 기반 번역 정확도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음성 텍스트 사진에 이르기까지 29개 언어를 자동 인식해 번역해준다. 지니톡은 2018 평창동계올림픽의 공식 소프트웨어로도 선정됐다. 최초의 언어장벽 없는 올림픽을 실현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전자책 독립출판 플랫폼인 ‘위퍼블’, 디지털 노트 수기(핸드라이팅) 서비스인 ‘플렉슬’ 등 신규 사업에서도 성과가 가시화하고 있다. 올해 4월 출시한 위퍼블은 전자책 저작도구와 클라우드 공유 플랫폼을 결합했다. 유튜브 동영상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쉽게 공유하듯이 전자책을 위퍼블로 손쉽게 공유 배포하는 ‘전자책 유튜브’를 표방하고 있다. 중국 디지털 출판업계 1위 기업인 베이다팡정과 손잡고 중국 디지털 출판 시장에도 진출했다.

미래창조과학부의 ‘교육유통’ 프로젝트 사업자로도 선정돼 국내 교육 콘텐츠 유통 생태계 조성에 앞장서고 있다.

이 같은 성과에 힘입어 김 회장이 인수할 당시 473억원이던 한컴의 매출은 100% 이상 늘어 올해 사상 첫 1000억원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김 회장은 “ETRI의 기술력과 스타트업의 아이디어를 결합해 한컴의 소프트웨어 생태계를 강화하고 해외시장에도 함께 진출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호기 기자 h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