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누가 누구를 탄핵하였는가
햇살 터지는 광장엔 승리의 환호성이 퍼지고 언론들은 저마다의 헌사를 내건다. 지식계와 연예계에 이르기까지 시민들은 촛불을 회고하며 승리를 자축한다. 이 얼마나 낯선 추억인가. 그러나…, 일말의 의심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한국인은 어떤 승리를 거둔 것이며, 한국 민주주의는 그 성공을 확신할 수 있겠는지.

만장일치의 환호성 역시 의심스럽다. 만장일치는 종종 우민(愚民)들의 허무한 열정에 불과했다. 그런 불안이 밤바다처럼 일렁거린다. 어떤 언론은 ‘구체제는 무너졌다!’고 헤드라인을 뽑았다. 그러나 구체제라니? 학창시절에 낡아빠진 싸구려 혁명서적을 너무 많이 읽은 것은 아닌가 하는 소감을 들려줄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를 법치로 배우지 못하고 혁명으로 배운 사람이 시민일 수는 없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정치적 변란은 혹 남미행 급행열차를 타고 후진형 인민주의로 내달릴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도 답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지 않아도 경제는 이미 남미행 위기로 치닫는다는 우려와 걱정이 소문처럼 나돌던 참이었다. 민주주의를 어리석은 자들의 것이라고 공격한 자는 소크라테스이고, 프랑스 혁명이 피의 독재를 부를 것이라고 비판한 것은 에드먼드 버크다. 소크라테스도 버크도 작은 비판의 한 조각조차 지면을 얻지 못할 정도로 한국의 지성계는 황폐하다. 오로지 군중에의 아부만 허용되는 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다. 트럼프 현상 때는 백인 블루칼라를, 브렉시트 때는 영국 촌놈들을 싸잡아 폄훼하던 한국 언론들은 그것들의 가장 극적인 형태인 최근의 한국 사태에 대해서는 찬양의 헌사로 도배질을 한다.

광장은 박근혜의 범죄 행위를 기억하기는 할 것인가. 국회 탄핵소추안의 참고자료 대부분이 언론보도라는 사실을 국회의원 몇 명이나 읽어보았을까. 박근혜를 견딜 수 없어 하는 이 거대한 증오와 실망의 열정이 만에 하나, 조작돼 부풀려진 의혹과 삐라처럼 뿌려진 과장보도 속에서 근거 없는 적개심으로 타올랐을 뿐이라면…. 시민혁명이 위대해지기 위해서라도 기소 사실은 모두 진실이 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괴이쩍게도 짜증스런 공기가 헌법재판소 법정을 지배할지도 모른다. 정치권의 공공연한 “유죄!” 압력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소위 1987체제 30년이었다. 이 혼란 속에서 국회는 절대권력을 얻어냈다. 언론도 그들의 동업조합이 한목소리를 내기만 하면 불과 한 달 만에 권력을 갈아엎을 수 있다는 힘을 과시했다. 광장을 조직한 단체들은 미군 장갑차 교통사고 때도, 반(反)한·미 FTA 때도, 광우병 때도 활개쳤던 바로 그들이다. 지난 수년 동안 어리석은 군중에 불과하던 그들이지만 이제는 열정의 민주시민으로 신분을 세탁해냈다. 거짓과 위선과 허구의 열정이 보상받는 희한한 일이 결국은 일어났다. 우리가 분노하는 것은 진정 바로 그것 때문이다. 민중집회가 시민집회로 승격되자 주최자들은 슬쩍 뒤로 몸을 숨겼다.

그러나 시대의 양심은 우리를 초월해 있다. 전진하는 역사 집단에 속해 있다는 고양된 감정, 민주주의를 회복한다는 숭고한 무언가에의 동참, 그러나 알고 보니 우왕좌왕했을 뿐인 무정형의 군중이었다는 사실이 언젠가는 폭로될지도 모른다. 박근혜 ‘범죄의 제국’은 증거를 통해 입증됐는지. 그 범죄성은 다른 전직 대통령들에 대해서도 공정한 심판의 잣대였는지, 혹여 일부나마 여성 대통령의 사생활에 대한 은밀하게 증폭된 ‘주홍글씨’적 관심사는 아니었는지 하는 질문의 심판대에 우리 자신을 세워야 한다.

지금 승리를 구가하는 것은 시민이라는 추상명사 뒤에 몸을 숨긴 소위 3대 세력이다. 대통령을 무릎 꿇린 여의도 정치, 광장 전문가인 강성 노조와 동맹군, 그리고 악화일로인 언론이다. 이들은 개혁돼야 할 낡은 것들의 대표다. 이들이 탄핵정국을 만들어냈고 기어이 승리를 거머쥐었다. 시간이 흐른 언젠가, 그 어떤 시민인가는 때늦은 회한의 눈물을 흘리게 될지 모르겠다. 누가 누구를 탄핵하였던가를 애써 기억해내며….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