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달 21일(현지시간) 황교안 국무총리는 오전 7시 뉴욕 JFK공항에 도착했다. 당시 사실상 직무정지 상태였던 박근혜 대통령을 대신해 페루 리마에서 열린 APEC정상회의에 참석한 뒤 귀국하면서 뉴욕을 들린 것이다. 황 총리가 뉴욕을 경유지로 잡은 것은 외교당국이 기획했던 마이크 펜스 부통령 내정자와의 면담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 시도는 불발로 끝났고, 황 총리는 7시50분부터 9시반까지 뉴욕서 공공기관 간담회를 가진 뒤 한국으로 돌아갔다.



#2. 김기환 뉴욕총영사는 국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결의를 이틀 앞둔 지난 6일(현지시간) “한국의 신정부 출범시기가 앞당겨져 미국의 새로운 정부와 비슷한 시기에 출발하게 되면 불확성성을 해소하는 전기가 마련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총영사의 발언은 이날 주미한국상공회의소(코참)가 개최한 송년만찬회 축사에서 나왔으며, 당시 한국 기업인들이 200명 넘게 참석했다. 김 총영사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도 한미 양국 정부가 비슷한 시기에 출범해 어려움을 극복한 전례가 있다”고 덧붙였다.



미·중간 대립과 북핵 사태 악화 등으로 동아시아의 긴장감이 커지는 가운데 탄핵 사태가 겹치며 한국이 지정학적 불확실성의 시기에 직면하고 있다. 미국 현지에서는 한국의 외교력의 공백으로 ‘외치’가 ‘내치’를 흔들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트럼프 인수위 내부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황 총리의 펜스 부통령 면담 무산과 관련, “트럼프 인수위측이 ‘지금은 때가 아니다’며 완강히 거부했다”고 전했다. 당시 박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는 촛불시위가 매 주말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우는 상황에서 자칫 차기 미 정부가 한국의 현 정부를 신임한다는 신호로 해석될 것으로 우려했다는 설명이다. 사드배치 등으로 가뜩이나 민감한 반미정서를 자극할 수 있다는 주한미대사관의 전문도 트럼프 당선자측의 판단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전해졌다.



뉴욕타임스(NYT)는 한국이 탄핵안 가결이라는 정치적 혼란과 함께 경제 저성장, 북한의 핵위협 증대, 중국의 영향력 강화라는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고 전했다. 뿐만 아니라 미국도 북한에 대한 강경입장을 견지하면서 대북제재 동참과 사드배치를 추진한 박근혜 정부의 정책기조가 약화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특히 미 정부내에서는 한국 정치권이 조기 대선체제에 들어가고, 탄핵사태로 인해 야당 대표가 차기 대선서 승리할 확률이 높아지면서 한국의 대북정책이 바뀔 가능성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미 정부내에서 미국의 사드배치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을 가장 우려하고 있다는 게 현지 외교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보수성향의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 집권시기의 긴밀했던 한미 동맹이 향후 정권교체시 미국에 비판적인 정책기조가 강화되고, 양국간 통상마찰 등으로 긴장감이 커질 것으로 예상했다. 야당 대권주자 대부분이 북한에 호의적인 반면 워싱턴과 도쿄와는 거리를 두는 성향이 강하다고 분석했다. 외교 전문가들은 한미 정상간 ‘리셋팅’이 늦어지면서 동아시아 외교전에 핵심 당사국인 한국이 소외되는 사태를 가장 우려하고 있다. 미국이 한국내 정치상황에 휘말리지 않겠다는 ‘정무적’ 판단에 따라 황 총리의 면담을 거절한 것도 심상찮은 기류라는 게 유엔 외교가의 분석이다.



외교당국은 미 대선 이전부터 누가 당선이 되든 상관없이 한미 정상회담의 조기추진을 준비해왔다. 미 국무부에도 한미 정상회담을 우선순위로 다뤄줄 것을 요청해놓은 상태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탄핵결의로 현재로선 내년 상반기중 성사는 불가능해졌다. 조태열 유엔대표부 대사는 “최근처럼 한국 외교환경의 엄중함을 절실하게 느껴본 적이 없다”며 “외교 안보 환경을 잘 헤쳐나가지 못하면 나라의 방향도 많이 틀려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뉴욕=이심기 특파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