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의 슬픔을 승화해내는 방식도 너무나 현세적이었다고 어느 학자는 고백하듯 진단했다.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그 사회학자는 “종교라고는 아예 없는 사회 같다”는 말로 정리했다. 내세, 사후라는 관념이나 영원, 다음 생에 대한 믿음이 조금이라도 없지 않다면, 슬픔의 사회적 승화가 그렇게도 안 될까 하는 의문이었다. 물론 슬픔은 컸다. 하지만 법률적, 정치적 책임 따지기와는 다른 차원의 신원(伸寃)도 가능할 터인데 좀체 보이지 않았다. 한국에도 종교는 다양하다. 소개 안 된 철학도 없다. 하지만 단지 기복 종교요, 오직 이론으로서의 철학일 뿐인가.
'먹방'세상…슬픔·분노 승화못해
미국산 소고기에 대한 광적인 소동은 그 변형판이었다. 광우병의 히스테리는 어디 가고 8년 만에 미국 소고기는 외국산 중 1위가 됐다. 밤을 밝힌 광장의 행렬은 어떤 투쟁이었으며, 지금 수입량 1위는 뭘 말하나. 한국 사회는 이렇게 즉물적이고 즉자적인가.
현대 한국 사회의 집단감정이 공감과 연대감이라는 심리학자도 있다. 그 이면에는 분노조절장애라는 부산물도 있다고 한다. 촛불행렬도 그런 프레임에서 볼 수 있겠다. 확신적 공감대를 찾을수록 왕따도 심해질 것이다. 물론 분노할 만하니 분노하고, 그것도 안 된다면 화병밖에 더 남느냐는 지적도 있다. 어떻든 분노는 한국인의 특징적 기질이 돼버렸다. 정신과 의사들의 교과서라는 DSM-4(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편람)에도 그렇게 올라 있다. 아예 영어로 ‘Hwabyung’(화병)이 국제 공인된 한국인의 문화적 신드롬처럼 됐다. 하지만 국민의 55%가 종교를 갖고 있다는 사실과는 아무래도 연결이 잘 안 된다. 분노나 슬픔이 종교로, 그 어떤 철학적 사유·명상으로도 승화가 안 된다면 중요한 치유 기제가 마비된 상황이다.
역동적? 즉물적·즉자적 사회
모순점, 부조화가 보이는 게 당연하다. 진정 현세적이라면 가장 현실적인 규범체계인 법에 대한 의식도 명확해야 맞다. 법질서의 시작이 공직부터인지, 시민 개개인이 먼저인지는 닭과 달걀 논쟁만큼이나 의미 없다. 분명한 것은 헌법 위에 떼법 있고, 떼법 위에 정서법이라는 현실에 법원조차 대중의 눈치를 살핀다는 점이다. 법전부터 펴보자는 지적은 늘 저리 가라다. 시민법·상법·노동법 등 법률책이 상시 베스트셀러인 독일은 말 그대로 딴 나라다.
현세적, 너무도 현세적이라는 것이 한국 특유의 빨리빨리 조급성, 분노장애 증후군과 무관할 수가 없다. 어느 쪽이 원인이고 어느 쪽이 현상·결과인지가 불분명할 정도로 한 덩어리다. 다음 세대는커녕 수년 뒤도 외면하는 판에 종교계가 나선대서 현세적 기질이 바뀔 것 같지는 않다. 곳곳의 정치과잉도 ‘현세주의 사회’ 결과이자 원인일 수 있다. 그래서 정치영역부터 바로 세우는 건 근본 치료법은 아니어도 보조치료제 정도는 된다. 월드컵 응원 때부터 계속 거리로 내달린 것을 단지 ‘역동적’이라는 레토릭으로 무작정 고취해댈까 그게 두렵다.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