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이 스러져간 독립운동가들을 위한 ‘진혼곡’…연극 ‘달의 목소리’
“조국이 날 버리네, 이럴 수 있나. 그토록 기다려온 독립인데….”

피아노 선율을 타고 참아왔던 설움이 터져 나온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광복 이후 돌아온 것은 차디찬 냉대와 멸시뿐이다. 광복 이후 일제 순사 였던 이에게 또다시 취조와 고문을 당하며 그는 생각한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 독립운동가들은 무엇을 위해 투쟁했는가. 독립은 누구를 위한 독립이며 투쟁이었나. 조국이란 무엇인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도맡았던 독립운동가 정정화(1900~1991)의 삶이 무대에서 되살아났다. 18일까지 서울 대학로 알과핵 소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 ‘달의 목소리’에서다. 연극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과거 청산이 현재를 옥죄는 한국의 현실을 비추는 듯 했다.

‘달의 목소리’는 배우 원영애(극단 독립극장 대표)가 홀로 출연하는 1인극이다. 해설자로 등장한 그는 어느새 역사 속의 정정화 선생이 돼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 그는 임시정부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앞에 나서 싸우는 대신 뒤에서 정성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0여년간 사선을 넘나들며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했다. 1920년 상하이로 망명한 그는 1946년 귀국할 때까지 ‘임시정부의 안주인’으로 살았다. 시아버지 김가진을 비롯해 김구, 이동녕, 이시영 등 임정 요인과 그의 가족들을 뒷바라지했다. 임정 요인 가운데 그가 지어준 밥을 먹지 않은 이가 없었다. 하지만 광복 이후에도 그의 삶은 평탄치 못했다. 독립운동 동지였던 남편은 한국전쟁이 앗아갔다.

무대 위에는 탁자 12개가 놓여 있다. 정정화 선생의 일생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탁자 위에 있는 전등이 하나씩 켜진다. 백범 김구, 시아버지 김가진 등 이름난 임정 요인들부터 정정화 선생을 돕다 일경의 고문을 받고 죽은 이세창까지 일제 강점기 목숨을 바쳐 싸웠던 이들을 위한 자리다. 한 사람 한 사람 세상을 떠날 때마다 정정화 선생은 이들을 상징하는 책상 위에 국화꽃을 바친다. 결국 연극은 정정화 한 사람의 삶을 기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름 없이 스러져간 독립운동가들을 위한 ‘진혼곡’이 된다.

연극은 상징으로 가득한 무대와 다큐멘터리 영상을 활용해 그의 생애에 대한 극적인 판타지를 걷어낸다. 중간 중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영상을 다큐멘터리로 보여주는 식이다. 취조실에서 취조를 당하는 장면은 무대에 설치된 카메라를 통해 영상으로 보여주는 기법을 택했다. 연극 제목은 정정화 선생의 회고록 《녹두꽃》의 한 대목에서 따 왔다. “달은 묵묵히 어둠을 비춘다. 가장 어둡다고 생각됐을 때 오히려 달은 세상을 더욱 환하게 비추고 있다. 그리고 날 비추고 있는 저 달은 모든 것을 보았을 것이다. 묵묵히 우리 조국을 그리고 우리 역사를…. 달은 이렇게 우리를 위로하듯 비추고 있었다.”

여전히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역사 앞에서 “시대를 제대로 타고 나야, 영웅도 영웅의 자격을 얻는다”는 대사가 계속 귓가에 맴돈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