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요, 우린 원수예요. 하지만 당신이 내 원수는 아니잖아요. 몬테규란 이름이 없어도 당신은 당신 자신이잖아. 아, 그럼 딴 이름으로 바꿔줘요! 장미꽃을 튤립이라고 불러도 향기는 변하지 않잖아.”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 발코니에 선 줄리엣 역의 배우 문근영(29·사진)이 느릿느릿한 말투로 셰익스피어의 시적 언어들을 현대적으로 풀어낸 대사를 쏟아내자 관객들은 숨을 죽였다. 청초한 눈망울과 새까만 긴 머리카락은 줄리엣의 대명사로 각인된 배우 올리비아 핫세를 연상시켰다.

문근영이 연극 ‘클로저’ 이후 6년 만에 무대에 섰다. 지난 15일 공연장에서 만난 그에게서 2000년 드라마 ‘가을동화’에서 송혜교 아역으로 출연한 이후 따라붙던 ‘국민 여동생’이란 타이틀을 던져버리고, 단단하게 중심을 잡고 걸어가는 ‘여배우’의 모습이 보였다.

“평생 동안 제가 언제 줄리엣 역할을 해보겠나 싶어서 선뜻 하겠다고 했어요. 연극 무대에선 오늘 온 관객들은 오늘의 나만을 기억하고 간직한다는 점도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 매 순간 무대에 오르기 전에 기도해요. 오늘 오신 관객들에게 멋진 순간을 꼭 하나쯤은 만들어주자고요.”

그만큼 치열하게 준비했다. 로미오 역을 맡은 동갑내기 상대 배우 박정민과 영문 희곡을 구해 읽었고, 다양한 번역본을 읽으면서 대사의 의미를 파고들었다.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은 필사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아직 자신의 연기가 마음에 꼭 차지 않는 듯했다. “무대라는 메커니즘이 익숙지 않아서 몸짓, 시선 처리, 발성 등 무대적인 언어가 여전히 미흡하더라고요. 두 시간 반 동안 인생 최고의 희극과 비극을 표현해낸다는 것도 만만치 않고요. 열심히 공부하고, 연습도 많이 했는데 아직은 완벽하게 전달이 되지 않는 것 같아서 속상하기도 해요. 제가 부족한 거니까 더 열심히 노력해야죠.”

문근영은 1999년 영화 ‘길 위에서’로 데뷔해 인생의 절반 이상을 배우로 살았다. ‘가을동화’에 이어 영화 ‘어린신부’로 대중에게 굳어진 ‘국민 여동생’ 이미지를 깨기 위해 노력해 왔다. 드라마 ‘바람의 화원’ ‘신데렐라 언니’ ‘마을-아치아라의 비밀’, 영화 ‘사도’ 등에서 끊임없이 변신을 시도했다. 내년에는 어른들을 위한 잔혹 동화인 영화 ‘유리 정원’으로 관객과 만난다.

그는 “지금까지 사방팔방으로 걸어온 것 같다”며 “한자리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면, 그게 못 견디게 괴롭다”고 했다.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연극 무대에 도전한 이유다. 머물러 있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자신을 한없이 괴롭힐 때도 있었다고 했다.

“‘위플래쉬’ ‘블랙 스완’ 같은 영화를 보면서 정말 많이 울었어요. 꼭 나를 보는 것 같아서요. 자기 자신의 한계를 깬다는 것, 정말 짜증나는 일인데 또 너무나 하고 싶은 일이에요.”

그래서일까. 자신만의 색깔을 가지고 싶다는 수많은 배우와 달리 그는 ‘무색무취’한 배우로 남고 싶다고 했다. “가끔 제 외모도, 연기도 식상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어요. 제가 식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끊임없이 무색무취여서 저를 보며 많은 감독과 작가들이 마구 영감을 떠올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런 색깔도 칠해보고, 저런 향기도 묻혀보고 싶은 그런 배우가 되고 싶어요.” 공연은 다음달 15일까지, 2만~6만6000원.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