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림동 한경갤러리의 송년 기획전 ‘아트 벨’에 전시된 유영국 화백의 ‘Work 2’.
서울 중림동 한경갤러리의 송년 기획전 ‘아트 벨’에 전시된 유영국 화백의 ‘Work 2’.
한국 미술시장의 ‘대장주’인 김환기 화백의 구상화 ‘항아리와 매화’는 조선 백자의 아름다움을 여과 없이 녹여낸 작품이다. 아무런 꾸밈도 없는 담백한 우윳빛 달항아리 앞에 삭풍을 견디며 막 꽃을 피운 매화 가지를 배치했다. 보름달이 나뭇가지에 걸린 것처럼 보이지만 선과 색들이 만들어 낸 완벽한 조형미는 절로 경외감에 빠져들게 한다.

김 화백의 달항아리 그림을 비롯해 탄탄한 실력을 갖춘 국내 화가들의 작품을 압축 아크릴 액자로 만든 뮤라섹(mulasec) 기법의 이색 판화 작품을 빵가게에서 빵을 고르듯 구입할 수 있는 전시회가 열린다. 19일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사 1층 한경갤러리에서 시작한 프린트베이커리 ‘아트 벨(Art Bell)’전이다.

서울옥션과 한경이 성탄절과 연말을 맞아 공동 기획한 이번 전시에는 김환기, 유영국, 박서보, 김창열, 오수환, 유선태, 정일, 윤병락, 정영주, 아트놈 등 작고·중견·신진 작가 19명의 뮤라섹 판화 38점이 걸렸다.

김환기 화백의 ‘항아리와 매화’.
김환기 화백의 ‘항아리와 매화’.
연말 부모님이나 연인, 스승, 지인 등에게 온정의 표시로 ‘문화’를 선물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뮤라섹 판화는 피그먼트 안료를 사용해 그림을 압축한 다음 아크릴 액자로 만든 아트 상품이다. 질감이 섬세하고 색감이 생생히 살아 있는 게 특징이다. 참여 작가들이 직접 고유번호(에디션)를 붙이고 사인도 했다. 작품값은 크기와 작가에 따라 점당 9만원부터 180만원까지 다양하게 책정했다.

출품작은 한국 근·현대미술의 스펙트럼을 다채롭게 보여준다. ‘산의 화가’로 유명한 유영국 화백의 색면추상화도 뮤라섹 판화로 만날 수 있다. 자연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리지 않고 내부에 숨어 있는 자연의 근원을 강렬한 원색으로 승화한 게 흥미롭다.

다음달 중순 영국 런던의 최대 화랑인 화이트큐브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여는 단색화가 박서보의 색채 ‘묘법’ 시리즈도 나와 있다. 전통 한지를 풀어 물감에 갠 것을 화폭에 올린 다음 밭고랑 같은 요철을 만들어 내는 방식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붓끝에서 배어 나온 촉각과 정신이 화면에 서로 맞물리며 밭고랑 같은 선을 따라 움직이는 게 이채롭다.

박서보 화백의 ‘묘법’.
박서보 화백의 ‘묘법’.
‘물방울 화가’ 김창열의 작품도 관람객을 반긴다. 천자문을 배경으로 느슨하게 스며드는 듯한 물방울이 우주의 광활한 울림이 돼 화면 위로 퍼진다. 중견 추상화가 오수환의 작품도 여러 점 걸렸다. 드러나는 형상 자체가 아니라 노장의 ‘무위’ 사상을 시각화하는 데 주안점을 둔 작품들로, 인간과 자연이 통하는 수많은 편린을 ‘우연의 미학’으로 잡아냈다.

유년 시절 고향 땅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을 여인과 꽃으로 묘사한 박항률의 작품, 생명사상을 선과 색채로 응축한 김병종의 반추상화, 동화 같은 사랑 이야기를 펼쳐 낸 정일의 그림, 사과를 통해 현대인의 귀소의식을 형상화한 윤병락의 작품 등에선 작가 특유의 재치와 미학을 엿볼 수 있다.

이옥경 서울옥션 대표는 “미술을 좋아하지만 선뜻 작품을 사기 쉽지 않은 일반인들이 손쉽게 그림을 골라 구입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프린트 베이커리’라는 브랜드를 만들었다”며 “성탄절과 연말에는 지인들에게 과일이나 술보다 화가들의 열정과 감성을 선물한다면 현장에서 뛰고 있는 작가들에게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30일까지. (02)360-4232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