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등장하자 긴장감이 감돌던 법정 안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최순실 씨(60)는 연두색 수의에 뿔테 안경을 쓰고 나타났다. 수감번호 628번을 달고 법정에 들어서던 최씨는 안을 가득 메운 방청객을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짓고 한 손으로 입을 가리기도 했다. 10월30일 독일에서 귀국한 뒤 이튿날 검찰에 출석하면서 “죽을 죄를 지었다”고 울먹였던 최씨는 첫 공판에서 모든 혐의를 부인하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2부(부장판사 김세윤)는 19일 오후 2시10분 서울법원종합청사 417호 대법정에서 최씨와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57),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47) 등 3명의 첫 공판준비기일을 열었다. 오후 3시20분께부터는 같은 장소에서 차은택 전 창조경제추진단장(47)과 송성각 전 한국콘텐츠진흥원장(58) 등 5명의 첫 공판준비기일이 이어졌다.

국정농단 사건 핵심인 최씨의 출석 여부는 이날 재판의 최대 관심사였다. 공판준비기일은 정식 심리에 앞서 재판의 쟁점과 입증 계획을 정리하는 자리다. 피고인이 출석할 의무는 없지만 이날 최씨는 예상을 깨고 재판장에 나타났다.

이날은 공판준비기일 임에도 불구하고 검찰과 변호인 사이에서 혐의 등에 대해 첨예한 대립이 오고가 향후 치열한 법적 공방을 예고했다.

공소장에 기소 검사로 이름을 올린 이원석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장과 한웅재 형사8부장 등 총 6명이 법정에 나온 검찰 측이 최씨의 11개 혐의에 대한 공소 요지를 설명했다. 이에 최씨 측 변호인인 이경재 변호사는 박근혜 대통령과 안 전 정책조정수석의 공범관계를 부인하면서 “검찰의 모든 공소사실을 부인한다”고 말했다. 안 전 수석과 공모해 포스코 계열 광고사 포레카를 강탈하려 한 혐의에 대해서는 “그런 사실이 없다”고 부인했다. 증거인멸 지시에 관련해서도 “사무실을 정리하라고 했을 뿐 증거를 없애라고 한 것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검찰과 최씨 측은 수사 방식을 놓고도 대립했다. 이 변호사는 “검찰이 최씨를 강압적으로 수사하고 인권을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검찰은 “그런 적이 절대 없다”고 반박했다. 이 변호사는 검찰이 최씨의 것으로 결론 내린 태블릿PC와 안 전 수석의 업무용 수첩 등 증거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고 감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최씨는 국민참여재판 여부를 묻는 재판부 질문에는 “안 하겠다. 철저한 규명을 원한다”고 답했다. 이어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 앞으로 재판에 성실하게 임하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첫 공판을 마쳤다. 최씨의 첫 재판은 예상보다 1시간가량 넘긴 오후 3시10분에서야 끝났다.

안 전 수석과 정 전 비서관은 최씨와 달리 이날 재판에 등장하지 않았지만 이 둘의 혐의 인정 여부는 극명하게 갈렸다. 안 전 수석의 변호인은 최씨 변호인의 혐의 부인에 이어 “기금 모금에 대해 박 대통령의 말을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에 전달했을 뿐이지 박 대통령과 최씨와 공모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 전 비서관의 변호인은 공무상비밀누설 혐의에 대해 “공소사실에 대해 전반적으로 인정한다”며 “자세한 의견서를 추후 제출하겠다”고 말했다.

같은 법정에서 이어진 공판준비기일에서도 피고인들의 혐의 부인은 이어졌다. 재판에 나오지 않은 차은택씨를 대신한 그의 변호인은 “기소된 횡령, 강요, 알선수재 등 4개 혐의 중 횡령 혐의만 인정한다”며 “나머지 혐의에 대해서는 범죄사실 자체를 부인한다”고 밝혔다. 송성각 전 원장은 최씨와 차씨 등과 함께 포레카를 인수한 컴투게더 한상규 대표를 협박해 강압적으로 지분 양도를 받으려다 미수에 그친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됐다. 하늘색 수의를 입고 법정에 선 송 전 원장은 “한상규씨는 30년 동안 따랐던 선배이고, 그 분이 많은 도움을 요청해 차씨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알아서 조심시키고 걱정하는 말을 전달한 것 뿐”이라며 “협박한 적도 공모한 적도 없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날 법정 안팎에는 세간의 관심을 반영하듯 상당한 인파가 몰렸다. 앞서 지난 16일 법원은 추첨을 통해 일반인 방청객 80명을 선발했다. 이 추첨에는 213명의 일반시민이 응모해 2.6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법원 관계자는 “지금까지 관심을 받았던 재판은 대부분 사건과 직·간접적인 관계가 있었던 시민들이 참석했지만, 이번처럼 고등학생부터 70대 어르신까지 다양한 연령에서 일반 시민이 참석한 경우는 없었다”며 “국정농단 의혹에 대한 높은 관심을 느꼈다”고 말했다. 방청의 기회를 잡지 못한 일반 시민들도 접근이 허가된 법정출입구까지 몰려 법정 주변은 발디딜 틈이 없었다. 방청권을 얻은 한 시민은 “촛불집회나 청문회에서 느꼈던 아쉬움을 재판이 공정하게 풀어줬으면 한다”며 “민주국가로 가는 현장에 참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상엽/구은서 기자 ls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