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광무황제의 꿈, 대한민국의 꿈
참으로 우울한 일이 많았던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이틀 후에 시작하는 2017년은 대한제국이 건설된 지 120주년이 되는 해다. 요즈음에는 10주년, 20주년, 100주년을 주목하지만 예전에는 60갑자를 사용했으므로 두 번째 회갑이 되는 120주년은 매우 특별한 해다.

1897년 10월12일에 고종은 경운궁(덕수궁) 정문을 나와 서울광장, 소공로를 거쳐 환구단으로 가서 황제 등극의를 거행했다. 대한제국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사흘 동안 고종은 22가지 행사를 거행했다. 고종이 환구단에서 천신과 지신에게 고유제를 올리고 황금의자에 앉아 황제로 등극하는 행사, 황제가 처음으로 조서를 반포하는 행사가 있었고, 을미사변 이후 장례를 미루던 민비를 황후로 책봉하고, 황태자와 황태자비를 책봉하는 행사도 있었다. 당시 행사의 주 무대는 환구단과 경운궁이었고, 경운궁에서는 태극전, 함녕전, 경소전 건물이 사용됐다. 황제가 등극한 환구단에는 현재 조선호텔이 서 있고 축하 행사가 열린 태극전은 지금의 즉조당에 해당한다. 함녕전은 고종의 침전이었고, 경소전은 명성황후의 빈전과 혼전(경효전)으로 쓰였지만 지금은 사라졌다. 환구단과 경운궁은 식민지 시기에 집중적으로 파괴됐다.

고종은 상당한 준비 과정을 거쳐 대한제국을 건설했다. 1894년에 국왕의 호칭을 ‘주상 전하’에서 ‘대군주 폐하’로 높였고, 1896년 새해부터 ‘건양’이란 연호를 사용했다. 동아시아 국가에서 연호는 황제만 사용할 수 있었다. 1896년 2월에 고종은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국왕이 외국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것은 국가의 위신상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궁궐 안에서 왕비가 일본인에게 피살되고 국왕의 생명도 위협을 받던 상황이었다. 고종은 러시아가 일본을 견제할 힘을 가졌고 일본 군대가 둘러싼 경복궁보다 각국 공사관이 몰려 있는 정동이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면서 역대 국왕들의 어진을 모신 진전과 왕비의 빈전을 경복궁에서 경운궁으로 옮겼다. 1897년 2월에 고종은 경운궁으로 돌아왔고 황제국을 건설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고종은 왕비의 시해로 촉발된 전 국민의 분노를 친일 역적을 처벌하고 국왕의 위상을 강화하며 왕비의 명예까지 높여주자는 방향으로 유도했다. 또 황제국의 전례를 정리한 대한예전을 편찬하고 천신과 지신을 모신 환구단의 제도를 정비하게 했다. 천신과 지신에 대한 제사는 황제만 지낼 수 있었다. 황제가 반포한 조서에서 국호는 ‘대한제국’, 연호는 ‘광무’였다. ‘대한’이란 국호는 조선이 삼한 땅을 하나로 통합했고 서울의 외교관들은 이미 ‘한국’이라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종이 대한제국의 광무황제가 되던 날 ‘독립신문’은 ‘조선이 몇천 년 동안 왕국으로 지내면서 청국으로부터 속국의 대접을 받아오다가 이를 통해 자주 독립한 대황제국이 되었다’고 보도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천황이 복권되고 중국에서는 여전히 황제가 지배하는 상황에서 조선은 왕국에 머물고 있었다. 이에 광무황제는 조선을 황제국으로 격상시켜 중국, 일본과 대등한 위상을 가진 자주독립국임을 분명히 하고 서양 국가의 협조를 받아 시대적 과제였던 근대화를 실현하려는 꿈을 가졌다. 그러나 그 꿈은 한·일합병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최근 문화재청에서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동했던 ‘왕의 길’을 복원하고 러시아 공사관과 덕수궁의 선원전, 흥덕전, 흥복전 등 덕수궁 일원을 복원, 정비할 계획임을 발표했다. 또 서울시에서는 덕수궁과 정동길을 중심으로 ‘대한제국의 길’을 제정하고 이 일대를 역사탐방로로 조성하고 있다. 2017년 새해에는 자주독립과 근대화라는 광무황제의 꿈과 함께 민주화와 남북통일이라는 대한민국의 꿈도 실현하는 희망의 해가 되길 기원한다.

김문식 < 단국대 교수·사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