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글은 내가 매년 메모 노트를 바꾸면서 첫장에 해만 달리해 써 두고 삶의 지표로 삼는 진솔한 기도문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삶의 만능키’로 활용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자신의 삶 안에서 어떻게 하느님의 이름을 신비에 가득 차게 하고, 자신은 바닥을 기는 자세로 표현하는가를 경쟁하는 것 같은데 이것이 오늘날 왜곡된 신앙의 한 단면인 것 같다.
지난해 3월 나는 가톨릭경제인 회원들과 함께 김수환 추기경 묘소에 가서 추모미사를 드렸다. 무덤가에 수많은 성모상이 놓여 있었다. “겨울 추위 속에서 살을 에는 한풍을 맞으며 죽은 이들과 함께한 성모님은 얼마나 추우셨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서늘했고, 위로자가 필요한 인간들에게 성모님의 두 손 모은 형상들은 죽음을 이기고 결정적인 신앙의 승리를 얻는 큰 힘임을 깨달았다.
누가 어떻게 말해도 우리 인간의 가슴에는 어머니가 따스하다. 예수님이 아무리 착한 목자라고 해도 예수님은 객관적인 권위를 행하는 분 같고, 성모님에게서 느끼는 희망과 사랑은 우리를 영생으로 더욱 잘 인도하는 것 같다.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라는 기도문을 외우면 내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지라도 예수님이 나에게 잘못을 채근하지 않을 것 같다.
내가 ‘하느님 할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어 하는 것은 내가 손자를 두고 나서야 느끼는 감성적 신앙고백이다. 아버지일 때의 행복과 애틋한 사랑과 그의 모든 것을 위하는 자세보다 할아버지가 됐을 때가 더욱 진하고 일방적인 사랑을 줄 수 있는 것 같다. 우리가 부르고 만나는 하느님은 내가 삶 속에서 느끼는 최고와 연결돼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오늘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주님’이란 말을 어디에서 어디에다 쓸까? 나는 내 일상의 삶 안에서 살아생전에 단 한 번도 쓰지 않을 것 같다.
그러면 우리의 구원자가 돼 주시고 형제가 돼 주신 예수님께 적절한 존경과 사랑이 깃든 언어를 새롭게 발견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기도의 말미에 당연히 붙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라는 기도문도 우리가 다시 곰곰이 성찰해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가 오늘날의 삶 안에 녹아 드는 표현을 써야 하지 않을까? 나는 이 기도문을 바치면서 왠지 민주 시민으로서는 해서는 안 될 ‘사바사바’를 하는 것 같다. 나는 오늘도 “하느님 할아버지”라고 기도한다!
유영희 < 유도그룹 회장 cmyu@yudohot.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