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인생술집’
tvN ‘인생술집’
“이 친구가 말을 참 센스 있게 하네.” “그런데 어쩌면 연기는 그렇게…. 하하” “그래 그래. 술자리인데 뭐. 다 얘기해봐.”

술상에 둘러앉은 이들 사이에서 반말이 편하게 오간다. 술기운에 다들 얼굴이 불콰하다. 실없는 이야기에 왁자지껄 웃던 이들이 하나씩 평소엔 하지 못한 마음속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서로 고민에 대한 조언을 주고받다가 흥이 오르자 즉석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지난해 12월8일 방영을 시작한 케이블채널 tvN의 예능프로그램 ‘인생술집’의 한 장면이다. 이 프로그램은 기존 토크쇼 무대를 술자리로 옮겼다. 연예인 패널과 유명인들이 함께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이다.

술 마시는 토크·음악 방송 ‘봇물’

‘먹방’ ‘쿡방’에 이어 ‘술방’이 뜨고 있다. 최근 술자리를 소재로 한 방송 콘텐츠가 연이어 등장했다. 방송 심의 규제가 덜한 케이블채널이나 모바일 플랫폼에서다. 토크쇼나 음악 예능 등 기존 프로그램 형식에 술을 접목했다.

tvN ‘인생술집’의 콘셉트는 퇴근길 술자리다. 진행을 맡은 방송인 신동엽과 탁재훈, 김준현이 유명인을 한두 명씩 초대해 술을 마신다. 촬영 스튜디오는 서울 연남동의 한 건물을 빌려 실제 술집처럼 꾸몄다.

지난 5일까지 배우 조진웅 박성웅 하지원 유인영, 야구선수 김현수, 뮤지컬 배우 정선아 등이 출연해 갖가지 사연을 풀어놨다. 조진웅은 연극 배우 시절 극단 단원들과 없는 돈을 털어 열었던 술자리를 들려줬다. 김현수는 두산 베어스 시절인 2008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병살타를 친 이야기를 들려주며 당시 감독과 팬들에게 미안했던 마음을 드러냈다. 일반인도 술자리에 초대한다. 티빙 홈페이지에서 취업준비생 모임, 직장 동료, 가족 등의 사연을 받아 출연진을 모집하고 있다.
SBS모비딕 ‘3차 가는 길’
SBS모비딕 ‘3차 가는 길’
SBS의 모바일방송국 SBS모비딕은 ‘3차 가는 길’을 방송하고 있다. 지난해 12월5일 첫선을 보인 이 프로그램도 ‘술 마시는 토크쇼’다. 연예인들이 1차부터 3차까지 자리를 옮기며 술 마시는 모습을 여과 없이 담았다. 방송에 앞서 지난해 11월9일엔 술자리 현장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생중계하기도 했다.

회마다 같은 출연진 여섯 명이 반복해 나온다. 방송인 탁재훈 정찬우 신봉선, 걸그룹 EXID 멤버 솔지, 가수 딘딘과 에디 킴이 출연한다. 제작진은 “평소 방송에서는 보기 힘든 연예인들의 뜻밖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며 “출연 전까지는 전혀 친분이 없던 여섯 사람이 술자리를 통해 친해지는 과정을 보는 재미도 있다”고 설명했다.

모바일방송국 메이크어스의 ‘이슬라이브’는 가수들이 취중 노래를 선보이는 영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걸그룹 EXID와 원더걸스, 아이돌그룹 비스트, 가수 거미와 백지영 등이 각각 술자리 즉석 가창에 참여했다. 지난해 12월20일엔 포장마차에서 정치인과 술을 마시는 시사 토크쇼 ‘뉴스포차’가 나오기도 했다.
쿡방·먹방 이어 이젠 '술방'…'취중진담'에 안방도 취한다
쿡방·먹방 이어 이젠 '술방'…'취중진담'에 안방도 취한다
격식 대신 ‘취중진담’

‘술방’의 공통 코드는 진솔함과 평범함이다. 술을 몇 잔 들이켠 출연진은 평소보다 ‘풀어진’ 모습을 보여준다. 솔직한 뒷이야기를 두서 없이 풀어내는가 하면, 토크쇼 초대 손님이 ‘나 화장실 갔다 올래’라며 잠시 자리를 비우는 모습도 그대로 방송을 탄다. 가수들은 화려한 무대나 음향 장비 대신 허름한 술집에서 수저로 박자를 맞추며 노래를 부른다.

이야기 내용도 그렇다. 지난 5일 ‘인생술집’에서 배우 유인영은 “누구나 단 한 번이라도 자기 일에서 ‘첫 번째’가 돼보고 싶을 텐데, 난 13년째 두 번째”라며 지금껏 주인공 역을 맡아 보지 못한 심정을 솔직히 드러냈다. 방송인 김준현은 “사실 나도 매번 먹기만 하는 뚱뚱한 돼지 역할은 그만하고 싶었던 적이 있다”며 “내 능력이 딱 그만큼인가 하는 생각에 슬럼프도 왔다”는 이야기를 털어놨다.

‘술 권하는 방송’ 우려도

술자리 특유의 흥과 분위기를 강조한 콘텐츠가 음주를 부추긴다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모바일 방송과 SNS를 주로 이용하는 청소년에 대한 우려가 크다. 연예인을 내세운 술자리 영상이 청소년의 모방 심리를 자극할 수도 있어서다.

케이블채널이나 모바일 방송은 음주 장면에 관해 별다른 규제가 없다. 방송심의 규정에도 정확한 가이드라인은 없다. ‘인생술집’은 채널 자체 심의를 거쳐 내용에 따라 15~19세 관람가로 방송된다. 모바일방송인 ‘3차 가는 길’과 ‘이슬라이브’ 등에는 시청 제한이 따로 없다. 대한보건협회는 “술을 긍정적인 이미지로만 인식시키는 방송 환경에 규제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며 “술자리 방송이 과음을 유발하거나 술을 잘 마시는 것을 능력인 것처럼 인식하게 할 수 있어 우려된다”고 밝혔다.

프로그램 제작진도 고민이 많다. ‘3차 가는 길’은 영상 도입부마다 “프로그램에 음주 장면이 포함돼 있습니다. 19세 미만 청소년은 따라하지 마세요”라는 문구를 넣었다. ‘인생술집’의 오원택 PD는 “방송에 절주 캠페인을 함께 넣는 방안 등을 고민했다”며 “즐겁고 건전한 술자리를 그린다면 건전한 음주문화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선한결 기자 alwa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