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길 걸었지만 꿈 포기하지 않았죠"
중앙대 영화과 다니다 찾아온 '시련'
21세로 부모님 모두 병치레로 수천만원 빚
생선 팔고 막일 하면서도 영화의 꿈 잃지 않아
28세에 복학해 만든 졸업작이 국제영화제 대상
CG회사 직접 세우는 건 꿈도 못 꿨지만…
영화 기획에서 배급까지 한 스튜디오가 맡는
할리우드 시스템 만들고 싶어 창업 결심
CG에 투자까지 한 번에 하는 회사 만들 것
사람들이 미쳤다고 하면 기분 좋아
영화도 잘됐고 돈도 벌었지만 기쁨은 잠시
남들이 두려워 가지 않는 길은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 믿어
이 같은 성공에는 본인의 노력도 있었겠지만, 좋은 배경도 있지 않았을까 궁금했다. 이를테면 집안의 전폭적 지원이나 든든한 조력자, 집안 내력인 탁월한 예술감각 등. ‘부잣집 아들’의 예술이라 불리던 영화판에서 ‘흙수저’가 성공할 수 있겠느냐는 시선이다.
인터뷰하는 동안 이런 편견은 금세 깨졌다. 가난하고 불우한 가정환경, 생선 장사를 하다 남들보다 늦은 나이(28세)에 시작한 학업 등 최악의 환경에서 이룬 흙수저 인생의 역전 드라마였다. 최근 신작 영화 ‘신과 함께’ 연출로 바쁜 김 감독을 6일 서울 상암동 덱스터스튜디오 본사에서 만났다.
◆다들 미쳤다고 했지만…
김 감독은 2011년 11월을 또렷이 떠올리며 얘기를 풀어갔다. 그는 당시 영화 ‘미스터 고’를 찍고 있었다. 주인공 고릴라를 3차원 컴퓨터그래픽(CG)으로 제작해야 하는데 비용이 문제였다. 할리우드 대표 스튜디오인 ILM(루카스필름 자회사) 등에서 산정한 비용은 800억~900억원. 이 영화 제작비(225억원)로는 감당이 안 됐다. 이 영화의 성패는 100% CG로 탄생한 고릴라 캐릭터가 얼마나 배우처럼 감정 표현을 잘해낼지, 실사에 어색함 없이 잘 녹아들지에 달려 있었다. 가격이 싼 국내 업체에 맡기는 것은 애초부터 성에 차지 않았다.
이때 국내 최고 VFX 전문가인 정성진 당시 EON 대표(현 덱스터스튜디오 디지털본부장)가 손을 내밀었다. 김욱 강종인 등 업계 최고수들도 돕겠다고 나섰다. VFX에 대한 김 감독의 감각과 이해도를 높게 평가했기 때문이다.
“CG회사를 직접 세우는 건 꿈도 꾸지 못했어요. 휴…. 영화감독도 이렇게 벅찬데요. 그런데 영화 기획에서 배급까지 한 스튜디오가 맡는 할리우드 시스템을 확립해보자는 제 꿈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창업을 결심했습니다.”
그가 회사를 세운다고 하자 일부에서는 ‘영화감독이나 잘할 것이지’란 질투 섞인 비아냥이 이어졌다. ‘영화감독으로 충분히 먹고살 수 있을 텐데 왜 어려운 길을 가려느냐’는 주위의 만류도 적지 않았다. 이에 대한 그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사람들이 ‘미쳤다’고 하면 오히려 기분이 좋았어요. 그 당시 영화도 잘됐고, 돈도 많았지만 성공했다는 기쁨은 잠깐이더라고요. ‘이게 인생인가’라는 생각과 함께 허무함이 찾아왔습니다. 새로운 도전을 할 시기라고 생각했죠. 남들이 이상하다고 하는 것은 남들이 그만큼 두려워한다는 얘기잖아요. 해볼 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김 감독은 데뷔작 영화 세 편을 잇달아 성공시키며 번 전 재산을 회사 자본금으로 댔다. 현재 그의 지분(27.25%) 가치는 500억원이 넘는다.
◆흙수저의 악바리 인생
김 감독 영화의 주인공에는 공통점이 있다. 못났지만 노력하는, 남들의 비웃음에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위해 열정을 쏟는 인물이다. 조로증에 걸린 이복동생 봉구에게 ‘진짜’ 형이 돼주는 불륜사진 전문 ‘찍사’ 상우(오!브라더스), 못생긴 외모 때문에 늘 남의 뒤에 서야 했던 한나(미녀는 괴로워) 등이 그랬다. 김 감독의 삶과 많이 닮은 캐릭터들이다.
김 감독은 중앙대 영화학과 33기다. 영화 ‘내부자들’을 만든 우민호 감독 등이 동기다. 그가 걸은 길은 그러나 동기들과 완전히 딴판이었다. 시련은 스물한 살에 찾아왔다. 부모님이 모두 장기간 병을 앓기 시작했다. 집안에 치료비를 댈 사람이 없었다. 그에게 떠넘겨진 빚만 수천만원에 달했다. 김 감독은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고향인 강원 춘천으로 내려가 생활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7년 동안 별의별 일을 다 했어요. 생선 장사를 하면서 하루에 고등어 500마리 배를 갈랐어요. 국회의원을 보좌하면서는 대통령 선거운동도 해 봤죠. 채석장 막노동은 차라리 쉬운 일에 속했습니다.”
김 감독은 ‘형편도 안 좋은데 내 꿈을 고집하는 게 맞느냐’며 거듭 자신에게 되물었다고 한다. 밤마다 꺽꺽 소리 내며 울었다. 고민은 그러나 그리 길지 않았다. 자신의 꿈에 한번 도전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도매상까지 차리며 꽤 크게 성장한 생선 장사를 접고 28세에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10년 만에 만든 대학 졸업작품도 제작비가 모자라 고향 동문회의 모금으로 겨우 완성했다. 그에게 찾아온 단 한 번의 기회를 그는 놓치지 않았다. 20대의 경험을 바탕으로 찍은 졸업작품 ‘자반고등어’로 로체스터국제영화제 대상을 받으며 영화계에 단번에 이름을 알렸다.
“고생에 너무 치인 나머지 감정이 메말라버리는, 그래서 더 팍팍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어요. 전 반대였던 것 같아요. ‘고생’을 인생의 자양분으로 만드는 건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김 감독의 이력은 화려하게 채워졌다. 세 편의 영화를 연이어 성공시켰다. 상업영화 감독으로선 보기 드물게 평단의 지지도 상당하다.
◆‘혹성탈출’ CG 100% 구현 가능
영화계에 몸담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덱스터스튜디오의 위상을 실감한다. 요즘 제작되는 영화에는 대부분 CG 효과가 들어간다. 덱스터스튜디오의 기술력은 한국뿐 아니라 중국 등 아시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예를 들어 ‘미스터 고’에 나온 웃고 찡그리고 속상해하는 고릴라의 생생한 표정, 야구복 위로 출렁이는 털의 움직임은 할리우드 CG 품질에 거의 근접했다는 평가다. 마크 밴댄베르겐 영화 아바타 VFX 감독은 이 회사의 기술과 관련해 “영화 해적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파도와 노을, 바닷속 고래 등은 유명 할리우드 VFX업체가 보여줄 수 있는 기술 수준의 95% 이상을 따라잡았다”고 평가했다.
김 감독의 목소리도 자신에 넘쳤다. “예컨대 할리우드 영화 ‘혹성탈출’의 CG 화면은 우리도 100% 똑같이 만들 수 있어요. 다만 수천명을 데리고 수백억원을 들여 한 일을 우리는 10분의 1 예산과 인력으로 해내야 하는 제약이 있을 뿐이죠. 같은 시간과 비용이 주어지면 우리가 더 잘할 겁니다.”
김 감독의 다음 목표는 덱스터스튜디오를 기획과 투자, 배급, VFX 등까지 한번에 할 수 있는 종합 영화제작사로 키우는 것이다. 한국에는 이런 회사가 없다. 하정우와 차태현이 출연하는 ‘신과 함께’도 이렇게 만들고 있다. 350억원에 달하는 제작비 투자도 거의 다 받았다.
“가난이 싫어서 벗어나려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요. 제가 원하는 걸 대부분 이뤘으니 더 많은 사람에게 기회를 주고 싶습니다. 물론 영화란 예술을 통해서 말입니다. 덱스터스튜디오를 통해 이제껏 제가 모은 ‘가치’와 ‘자산’을 영화와 관련된 모든 사람과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덱스터스튜디오는…
할리우드도 인정한 CG…중국 수출로 새 한류 구축
영화 ‘구미호’(1994)를 시작으로 한국 영화에 컴퓨터그래픽(CG)과 시각특수효과(VFX)가 도입된 뒤 한국의 기술력은 날로 향상되고 있다.
정보통신산업진흥원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CG 해외 매출은 500억원에 육박한 것으로 조사됐다. CG 해외 매출은 2014년 288억원에서 2015년 437억원으로 51.7% 상승한 뒤 지난해에도 견조한 증가세를 보였다.
덱스터스튜디오는 전체 매출의 70~80%를 중국에서 올리고 있다. 2013년 중국법인을 설립해 쉬커(徐克) 감독의 ‘적인걸’을 시작으로 ‘몽키킹 3D’ ‘지취위호산’ 등 다수 흥행작을 맡으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VFX 기술을 중국에 수출하는 새로운 한류 영역을 구축했다”(한승호 신영증권 연구원)는 평가다.
지난해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결정으로 국내 미디어 기업이 어려움을 겪을 때도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지난해 12월 ‘한한령(限韓令·한류 금지령)’ 속에서 중국 알파그룹으로부터 김용화 감독이 연출하는 ‘신과 함께’에 1500만위안(약 25억5000만원)을 투자받았다. 알파그룹은 중국 최대 애니메이션 회사다. 김 감독은 “대체하기 쉽지 않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수출하기 때문에 사드의 영향을 받고 있지 않다”고 설명했다.
국내 VFX업체에 대한 투자·인수전도 치열하다. 2015년 4월 중국 다롄완다그룹이 1000만달러(약 110억원)를 덱스터스튜디오에 투자해 김용화 대표에 이어 2대 주주가 됐다. 완다그룹은 세계 멀티플렉스 극장 1위다. 영화제작사 화이브러더스는 2015년 심엔터테인먼트를 인수한 데 이어 VFX업체 매드맨포스트 지분 66.67%를 사들였다.
김우섭 기자 dut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