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장엄한 후지산…고즈넉한 산골마을…열도의 첫사랑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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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산과 온천 마을이 있는 일본 시즈오카
호텔 창문을 열면 새파란 하늘 아래
거대한 후지산이 우뚝…그림 같은 비경 뽐내
다누키 호숫가에 서면 태양이 분화구에 걸린
'다이아몬드 후지' 감상 평화로운 여운 남아
온천마을 슈젠지에는 전통 료칸이 옹기종기
따근한 노천탕 앉으니 주홍빛 일출이 압권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이즈의 무희' 배경
7개 폭포 어우러진 순수한 사랑의 장소
호텔 창문을 열면 새파란 하늘 아래
거대한 후지산이 우뚝…그림 같은 비경 뽐내
다누키 호숫가에 서면 태양이 분화구에 걸린
'다이아몬드 후지' 감상 평화로운 여운 남아
온천마을 슈젠지에는 전통 료칸이 옹기종기
따근한 노천탕 앉으니 주홍빛 일출이 압권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이즈의 무희' 배경
7개 폭포 어우러진 순수한 사랑의 장소
시끄러운 도시 대신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생각의 때를 벗기고 싶었다. 새해를 앞두고 잠들었던 영감을 일깨우는 여행지로 떠나고 싶었다. 도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시즈오카는 최적의 장소였다. 맑은 날 후지산 산허리에 걸린 뭉게구름을 봤고, 노천탕에 누워 쏟아질 듯한 밤하늘의 별을 세었다. 어느 소설가가 쓴 첫사랑 이야기를 따라가며 산길을 걷기도 했다. 고즈넉하고 아늑한 시즈오카에는 낭만이 깃들어 있었다.
축복받은 마을 후지노미야
시즈오카에 도착한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호텔 방 창문부터 열었다. 차갑지만 맑은 겨울 공기가 콧속을 파고들어 남은 잠을 쫓아줬다. 고개를 내밀고 숨을 깊게 들이쉬며 오른쪽을 쳐다봤다. 그 순간 입에서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 아래 거대한 후지산이 빛나고 있었다. 이상한 조합이었다. 역 앞 허름한 호텔에서 그토록 고대하던 후지산과 마주할 줄이야. 창문 너머 처음 본 후지산은 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비경을 자랑했다.
후지노미야는 후지산 남서쪽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시즈오카공항에서는 약 82㎞ 떨어져 있다. 이곳은 축복받은 마을임이 틀림없다. 일본의 수많은 문학작품과 전설, 시와 그림 속에 등장한 후지산을 매일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다니. 후지노미야는 등산로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여기서 출발해 해발 3776m 후지산 정상 분화구까지 약 4시간30분 걸린다.
등반은 여름철인 7월 초순부터 9월 초순까지만 할 수 있고 다른 기간에는 입산이 통제된다. 때를 놓쳤다고 해도 아쉬울 것은 없다. 꼭 정상에 올라야 제맛은 아니다. 산 아래에서 전체를 바라보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다.
탁 트인 구릉지대에 홀로 우뚝 솟은 후지산은 세계적인 미산(美山)이다. 원뿔형의 유려한 산세와 새하얀 만년설, 구름을 휘감은 모습은 장엄하다 못해 성스럽기까지 하다. 가쓰시카 호쿠사이가 후지산을 그린 우키요에(일본 전통 목판화)도 실물만 못 했다.
어린아이를 수호하는 후지산 센겐 신사 후지노미야의 시내 중심에는 후지산 본궁 센겐신사가 있다. 산을 오르지 않아도 후지산의 정기를 듬뿍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후지산은 예부터 영험한 산으로 여겨졌고 나중에는 하나의 신앙으로 발전했다. 후지산을 신으로 삼는 센겐신사는 일본 전역에 약 1300개가 있다. 그중에서도 후지산 본궁 센겐 신사가 총본산이다. 후지노미야라는 마을 이름도 본궁(本宮)에서 왔다.
후지산 등반객은 입산 전 꼭 이곳 센겐신사에 들러 안전을 기원한다. 등산철이 아닐 때는 아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 참배객이 많다. 일반 신사와 다르게 기모노를 곱게 차려입은 아이들이 눈에 띈다. 후지산이 아이들의 수호신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신사 한편에는 순산 부적, 포대기에 싸인 아기 모양의 건강 부적도 판다.
본당에서 오른쪽 길로 빠져나오면 작고 예쁜 와쿠타마 연못이 있다. 후지산에 오르기 전 연못물을 마시는 것은 오래된 전통이다. 물은 후지산에서 내려온 지하수라 바닥이 훤히 비칠 정도로 맑다. 물을 마셔 보니 떫은 뒷맛이 전혀 없고 산뜻한 여운이 입안에 오래 남았다.
다이아몬드 후지를 볼 수 있는 다누키 호수
센겐신사를 나와 차를 타고 서북쪽으로 30분 정도 가면 다누키 호수에 닿는다. 해발 600m의 분지에 형성된 호수다. 굽이진 산길을 지나 다누키 호수에 내리자 마치 세상과 격리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숲속의 오두막, 낚시하는 사람들, 울창한 숲과 잔잔한 물결이 북유럽의 어느 호숫가라고 해도 믿을 만하다. 후지산이 이곳이 일본임을 상기시킬 뿐.
‘다이아몬드 후지’로 불리는 자연현상을 다누키 호수에서 볼 수 있다. 후지산 정상 분화구에 태양이 걸리는 모습을 ‘다이아몬드 후지’라고 부른다. 매년 4월20일 전후 1주일, 8월20일 전후 1주일이 다이아몬드 후지 현상을 보기 좋은 날로 꼽힌다. 이맘때 후지산 정상에 태양이 걸린 모습을 찍기 위해 전국에서 사진가들이 몰려온다. 다이아몬드 후지 전망대는 다누키 호수의 가장 안쪽, 후지산이 정면에 보이는 위치에 있다.
안내센터에서 자전거를 빌려 타고 15분 정도 가자 전망대가 보였다. 다누키 호수는 지극히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이동하는 도중 후지산에 뭉게구름이 걸렸다. 하는 수 없이 벤치에 앉아 구름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잠깐 들르는 여행자가 맑은 날 구름 한 점 없는 후지산을 보기란 꽤 어려운 일이다. 후지산을 찍으려고 삼각대를 세워둔 노인들도 구름이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소음이 사라진 광활한 침묵 속에서 시간이 이토록 천천히 흐르는 것이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빠르게 돌아가던 내 안의 시계도 오랜만에 제 속도를 찾았다. 구름이 걷히지 않아도 괜찮았다. 후지산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우니까. 산골짜기 온천마을과 첫사랑 문학
시즈오카는 온천으로도 유명하다. 온천 지대는 시즈오카 동부의 이즈반도에 있다. 이즈의 매력은 온천을 빼놓고 이야기하기 어렵다. 산골짜기의 고즈넉한 온천장부터 바다가 보이는 탁 트인 온천장까지 선택의 폭이 무척 넓다.
그중 후지노미야에서 동남쪽으로 약 56㎞ 떨어진 슈젠지(修善寺)는 이즈반도에서도 유서 깊은 온천 마을로 꼽힌다. 강을 따라 오래된 전통 료칸이 옹기종기 이어진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로 유명한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가 요양한 기쿠야 료칸,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가 즐겨 찾은 아마기 료칸도 있다.
슈젠지는 마을 이름인 동시에 절 이름이다. 일본 진언종 시조인 홍법대사 공해(空海)가 807년 창건한 슈젠지가 마을의 상징이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고색창연한 산사다. 봄에는 벚꽃, 가을이면 단풍과 어우러져 한층 더 운치가 짙다. 절 앞 강가에는 홍법대사가 남긴 유산 ‘돗코노유’가 있다.
전설에 의하면 강에서 병든 아버지의 몸을 씻기는 소년을 보고 감동한 홍법대사가 바위를 내리쳐 온천수를 샘솟게 했다고 한다. 어림잡아 1200년 역사를 지닌 이 온천탕은 이즈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이며, 여전히 마을의 대중 족욕탕으로 사랑받고 있다. 아기자기한 골목 카페와 소박한 식당, 사시사철 청량한 대나무 오솔길도 소소한 재미를 준다. ‘일본인의 첫사랑’ 이야기가 담긴 곳
시즈오카를 여행할 때 각기 매력이 다른 온천 숙소를 찾아보는 것도 큰 재미다. 슈젠지에서 남쪽으로 11㎞ 떨어진 온천마을 유가시마는 관광보다는 휴양에 어울리는 곳이다. 외딴 계곡에 있어 예스럽고 토속적인 정취가 짙다. 민가 분위기의 숙소, 멧돼지 전골 요리가 특징이다.
숙소에 짐을 풀고 제일 먼저 향한 곳은 노천탕이었다. 1200년 된 거목으로 만든 따끈한 탕에 들어가 별빛과 주홍빛 일출을 보는 것은 가히 압권이었다. 저녁은 멧돼지 전골이 나와 놀랐다. 추운 겨울에 이로리(일본식 화로) 앞에 앉아 마시는 녹차도 인상적이다. 마치 깊은 산속에 자리 잡은 나무꾼의 산채를 빌려 편히 쉬는 기분이랄까.
유가시마에서는 또 다른 거장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일본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1922년 유가시마 온천에서 요양하며 처녀작 《이즈의 무희》 초고를 완성했다. 유모토칸 료칸에는 작가가 묵었던 방이 보존돼 있다.
《이즈의 무희》는 이즈반도 여행 중 유랑공연단과 동행하게 된 스무살 대학생이 어린 무희에게 순수한 사랑을 느끼는 내용이다. 첫사랑을 다룬 작품을 이야기할 때 국내에는 황순원의 《소나기》가 있듯이 일본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즈의 무희》를 떠올린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21세 때인 1921년 이즈를 여행했다. 작품에는 이때의 경험과 풍광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경험을 토대로 썼기 때문일까. 1세기 전에 쓰인 이야기인데 지금 읽어도 애절하게 심금을 울린다.
작품의 실제 배경을 찾고 싶다면 유가시마에서 남쪽으로 18㎞ 정도 떨어진 가와즈 나나다루로 가면 된다. 이곳에는 일곱 개의 폭포가 있다. 그중 소설 속 남녀가 대화를 나눈 장소는 쇼케이다루 폭포다. 산속이지만 산책하듯 천천히 걸어도 금방 갈 수 있다. 폭포 앞에는 소설 속에서 튀어 나온 듯한 무희와 청년의 동상이 있다. 폭포와 함께 어우러진 동상은 좋은 포토존이 돼준다.
시즈오카 여행 내내 따뜻한 인정과 자연을 만날 수 있었다. 산과 계곡, 바다, 온천을 다니며 그간 얽히고설킨 머릿속이 조금씩 비워졌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내 마음은 씻어낸 것처럼 후련했다. 이런 것을 두고 힐링 여행이라고 하는 것일까. 기울어진 비행기 창밖으로 후지산이 보이다 멀어져 갔다. 이제 새롭게 채울 일만 남았다.
시즈오카=도선미 여행작가 dosunmi@gmail.com
여행정보
시즈오카는 사계절이 뚜렷하며 연평균 기온이 16.1도로 온난한 편이다. 위도가 오사카와 비슷해 겨울에도 따뜻하다. 다만 해가 일찍 지기 때문에 낮 시간을 잘 활용하는 것이 좋다. 그간 접근성이 떨어진 시즈오카는 최근 에어서울이 신규 취항하면서 편리해졌다. 인천~시즈오카 노선을 주 5회(월·화·목·금·토요일) 운항한다. 후지산과 슈젠지, 가와즈를 모두 다니려면 렌터카로 이동하는 것이 편하다. 시즈오카공항에는 도요타, 닛폰, 오릭스 렌터카 서비스센터가 있다. 올해 2월28일까지 5000엔 환급 이벤트도 열고 있다. 연비가 높은 하이브리드카를 선택하면 기름값을 대폭 절약할 수 있다.
축복받은 마을 후지노미야
시즈오카에 도착한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호텔 방 창문부터 열었다. 차갑지만 맑은 겨울 공기가 콧속을 파고들어 남은 잠을 쫓아줬다. 고개를 내밀고 숨을 깊게 들이쉬며 오른쪽을 쳐다봤다. 그 순간 입에서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 아래 거대한 후지산이 빛나고 있었다. 이상한 조합이었다. 역 앞 허름한 호텔에서 그토록 고대하던 후지산과 마주할 줄이야. 창문 너머 처음 본 후지산은 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비경을 자랑했다.
후지노미야는 후지산 남서쪽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시즈오카공항에서는 약 82㎞ 떨어져 있다. 이곳은 축복받은 마을임이 틀림없다. 일본의 수많은 문학작품과 전설, 시와 그림 속에 등장한 후지산을 매일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다니. 후지노미야는 등산로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여기서 출발해 해발 3776m 후지산 정상 분화구까지 약 4시간30분 걸린다.
등반은 여름철인 7월 초순부터 9월 초순까지만 할 수 있고 다른 기간에는 입산이 통제된다. 때를 놓쳤다고 해도 아쉬울 것은 없다. 꼭 정상에 올라야 제맛은 아니다. 산 아래에서 전체를 바라보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다.
탁 트인 구릉지대에 홀로 우뚝 솟은 후지산은 세계적인 미산(美山)이다. 원뿔형의 유려한 산세와 새하얀 만년설, 구름을 휘감은 모습은 장엄하다 못해 성스럽기까지 하다. 가쓰시카 호쿠사이가 후지산을 그린 우키요에(일본 전통 목판화)도 실물만 못 했다.
어린아이를 수호하는 후지산 센겐 신사 후지노미야의 시내 중심에는 후지산 본궁 센겐신사가 있다. 산을 오르지 않아도 후지산의 정기를 듬뿍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후지산은 예부터 영험한 산으로 여겨졌고 나중에는 하나의 신앙으로 발전했다. 후지산을 신으로 삼는 센겐신사는 일본 전역에 약 1300개가 있다. 그중에서도 후지산 본궁 센겐 신사가 총본산이다. 후지노미야라는 마을 이름도 본궁(本宮)에서 왔다.
후지산 등반객은 입산 전 꼭 이곳 센겐신사에 들러 안전을 기원한다. 등산철이 아닐 때는 아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 참배객이 많다. 일반 신사와 다르게 기모노를 곱게 차려입은 아이들이 눈에 띈다. 후지산이 아이들의 수호신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신사 한편에는 순산 부적, 포대기에 싸인 아기 모양의 건강 부적도 판다.
본당에서 오른쪽 길로 빠져나오면 작고 예쁜 와쿠타마 연못이 있다. 후지산에 오르기 전 연못물을 마시는 것은 오래된 전통이다. 물은 후지산에서 내려온 지하수라 바닥이 훤히 비칠 정도로 맑다. 물을 마셔 보니 떫은 뒷맛이 전혀 없고 산뜻한 여운이 입안에 오래 남았다.
다이아몬드 후지를 볼 수 있는 다누키 호수
센겐신사를 나와 차를 타고 서북쪽으로 30분 정도 가면 다누키 호수에 닿는다. 해발 600m의 분지에 형성된 호수다. 굽이진 산길을 지나 다누키 호수에 내리자 마치 세상과 격리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숲속의 오두막, 낚시하는 사람들, 울창한 숲과 잔잔한 물결이 북유럽의 어느 호숫가라고 해도 믿을 만하다. 후지산이 이곳이 일본임을 상기시킬 뿐.
‘다이아몬드 후지’로 불리는 자연현상을 다누키 호수에서 볼 수 있다. 후지산 정상 분화구에 태양이 걸리는 모습을 ‘다이아몬드 후지’라고 부른다. 매년 4월20일 전후 1주일, 8월20일 전후 1주일이 다이아몬드 후지 현상을 보기 좋은 날로 꼽힌다. 이맘때 후지산 정상에 태양이 걸린 모습을 찍기 위해 전국에서 사진가들이 몰려온다. 다이아몬드 후지 전망대는 다누키 호수의 가장 안쪽, 후지산이 정면에 보이는 위치에 있다.
안내센터에서 자전거를 빌려 타고 15분 정도 가자 전망대가 보였다. 다누키 호수는 지극히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이동하는 도중 후지산에 뭉게구름이 걸렸다. 하는 수 없이 벤치에 앉아 구름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잠깐 들르는 여행자가 맑은 날 구름 한 점 없는 후지산을 보기란 꽤 어려운 일이다. 후지산을 찍으려고 삼각대를 세워둔 노인들도 구름이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소음이 사라진 광활한 침묵 속에서 시간이 이토록 천천히 흐르는 것이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빠르게 돌아가던 내 안의 시계도 오랜만에 제 속도를 찾았다. 구름이 걷히지 않아도 괜찮았다. 후지산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우니까. 산골짜기 온천마을과 첫사랑 문학
시즈오카는 온천으로도 유명하다. 온천 지대는 시즈오카 동부의 이즈반도에 있다. 이즈의 매력은 온천을 빼놓고 이야기하기 어렵다. 산골짜기의 고즈넉한 온천장부터 바다가 보이는 탁 트인 온천장까지 선택의 폭이 무척 넓다.
그중 후지노미야에서 동남쪽으로 약 56㎞ 떨어진 슈젠지(修善寺)는 이즈반도에서도 유서 깊은 온천 마을로 꼽힌다. 강을 따라 오래된 전통 료칸이 옹기종기 이어진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로 유명한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가 요양한 기쿠야 료칸,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가 즐겨 찾은 아마기 료칸도 있다.
슈젠지는 마을 이름인 동시에 절 이름이다. 일본 진언종 시조인 홍법대사 공해(空海)가 807년 창건한 슈젠지가 마을의 상징이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고색창연한 산사다. 봄에는 벚꽃, 가을이면 단풍과 어우러져 한층 더 운치가 짙다. 절 앞 강가에는 홍법대사가 남긴 유산 ‘돗코노유’가 있다.
전설에 의하면 강에서 병든 아버지의 몸을 씻기는 소년을 보고 감동한 홍법대사가 바위를 내리쳐 온천수를 샘솟게 했다고 한다. 어림잡아 1200년 역사를 지닌 이 온천탕은 이즈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이며, 여전히 마을의 대중 족욕탕으로 사랑받고 있다. 아기자기한 골목 카페와 소박한 식당, 사시사철 청량한 대나무 오솔길도 소소한 재미를 준다. ‘일본인의 첫사랑’ 이야기가 담긴 곳
시즈오카를 여행할 때 각기 매력이 다른 온천 숙소를 찾아보는 것도 큰 재미다. 슈젠지에서 남쪽으로 11㎞ 떨어진 온천마을 유가시마는 관광보다는 휴양에 어울리는 곳이다. 외딴 계곡에 있어 예스럽고 토속적인 정취가 짙다. 민가 분위기의 숙소, 멧돼지 전골 요리가 특징이다.
숙소에 짐을 풀고 제일 먼저 향한 곳은 노천탕이었다. 1200년 된 거목으로 만든 따끈한 탕에 들어가 별빛과 주홍빛 일출을 보는 것은 가히 압권이었다. 저녁은 멧돼지 전골이 나와 놀랐다. 추운 겨울에 이로리(일본식 화로) 앞에 앉아 마시는 녹차도 인상적이다. 마치 깊은 산속에 자리 잡은 나무꾼의 산채를 빌려 편히 쉬는 기분이랄까.
유가시마에서는 또 다른 거장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일본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1922년 유가시마 온천에서 요양하며 처녀작 《이즈의 무희》 초고를 완성했다. 유모토칸 료칸에는 작가가 묵었던 방이 보존돼 있다.
《이즈의 무희》는 이즈반도 여행 중 유랑공연단과 동행하게 된 스무살 대학생이 어린 무희에게 순수한 사랑을 느끼는 내용이다. 첫사랑을 다룬 작품을 이야기할 때 국내에는 황순원의 《소나기》가 있듯이 일본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즈의 무희》를 떠올린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21세 때인 1921년 이즈를 여행했다. 작품에는 이때의 경험과 풍광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경험을 토대로 썼기 때문일까. 1세기 전에 쓰인 이야기인데 지금 읽어도 애절하게 심금을 울린다.
작품의 실제 배경을 찾고 싶다면 유가시마에서 남쪽으로 18㎞ 정도 떨어진 가와즈 나나다루로 가면 된다. 이곳에는 일곱 개의 폭포가 있다. 그중 소설 속 남녀가 대화를 나눈 장소는 쇼케이다루 폭포다. 산속이지만 산책하듯 천천히 걸어도 금방 갈 수 있다. 폭포 앞에는 소설 속에서 튀어 나온 듯한 무희와 청년의 동상이 있다. 폭포와 함께 어우러진 동상은 좋은 포토존이 돼준다.
시즈오카 여행 내내 따뜻한 인정과 자연을 만날 수 있었다. 산과 계곡, 바다, 온천을 다니며 그간 얽히고설킨 머릿속이 조금씩 비워졌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내 마음은 씻어낸 것처럼 후련했다. 이런 것을 두고 힐링 여행이라고 하는 것일까. 기울어진 비행기 창밖으로 후지산이 보이다 멀어져 갔다. 이제 새롭게 채울 일만 남았다.
시즈오카=도선미 여행작가 dosunmi@gmail.com
여행정보
시즈오카는 사계절이 뚜렷하며 연평균 기온이 16.1도로 온난한 편이다. 위도가 오사카와 비슷해 겨울에도 따뜻하다. 다만 해가 일찍 지기 때문에 낮 시간을 잘 활용하는 것이 좋다. 그간 접근성이 떨어진 시즈오카는 최근 에어서울이 신규 취항하면서 편리해졌다. 인천~시즈오카 노선을 주 5회(월·화·목·금·토요일) 운항한다. 후지산과 슈젠지, 가와즈를 모두 다니려면 렌터카로 이동하는 것이 편하다. 시즈오카공항에는 도요타, 닛폰, 오릭스 렌터카 서비스센터가 있다. 올해 2월28일까지 5000엔 환급 이벤트도 열고 있다. 연비가 높은 하이브리드카를 선택하면 기름값을 대폭 절약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