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과 다큐 결합한 렉처멘터리 KBS '명견만리'
일방적 전달 대신 청중과 소통, 풍성한 의견 나누며 통찰 얻어
인구·경제·의료·정치 등 주제 다양…책으로도 나와 베스트셀러 기록
이 책은 KBS 시사교양 프로그램 ‘명견만리’에서 인구, 경제, 북한, 의료를 키워드로 방송한 내용을 엮은 것이다. 명견만리(明見萬里)는 ‘밝은 지혜로 만리를 내다본다는 뜻. 포맷도 특이하다. 강연과 다큐멘터리를 결합한 ‘렉처멘터리(lecturmentary)’ 형식이다. ‘명견만리’ 기획에 참여한 이윤정 PD는 “강연자가 ‘정답’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꼰대 방송’은 피하자는 생각에서 렉처멘터리 형식을 택했다”며 “일방적인 지식 전달보다 ‘건강한 공론의 장(場)’을 만들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전문가의 생생한 취재와 미래 전망
강연자는 궁금한 내용을 직접 취재해 이를 강의와 함께 영상으로 보여준다. 방청객은 강연 내용에 대해 현실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시청자는 이 과정에서 한 가지 주제에 대해 풍성한 의견을 듣고, 자신만의 깊이 있는 통찰을 얻는다.
지난 13일 방송한 ‘위기의 정치’편은 기성정치 혐오가 세계 정치의 판을 뒤흔드는 가운데 우리 정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했다. 강연자는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현지를 찾은 제작진은 일자리를 잃지 않을까 불안에 떠는 백인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려준다. 그들은 말한다. “이제 당은 의미 없다고 생각해요. 제 문제를 골라 투표할 뿐이에요.” 강 교수는 데이비드 이스턴 시카고대 교수의 말을 인용해 “정치는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우리 정치권이 자원 분배 및 정책 우선순위와 방향 설정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살폈다.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에 빠져 공약을 남발하다 2014년 13조원의 부채를 짊어진 인천시는 대표적인 실패 사례다.
이어 세계 곳곳에서 시민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당이 구성되는 현장을 살폈다. 아이슬란드에서는 ‘정치판의 로빈 후드’로 불리는 ‘해적당’이, 이탈리아에서는 평균 연령 37세의 젊은 정당 ‘오성운동’이, 스페인에서는 긴축정책에 반대하는 시민을 중심으로 한 ‘포데모스’(우리는 할 수 있다)가 등장했다. 강 교수는 “포데모스 현상이야말로 왜 정치가 시민과 함께 가야 하는지, 시민의 참여가 정치 지형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례”라고 설명했다. 온라인·모바일콘텐츠로도 선보여
‘명견만리’의 핵심은 ‘미래 참여단’이다. 방청객으로 참여한 이들은 현실적인 질문을 던지며 ‘명견만리’를 ‘건강한 공론장’으로 만든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강연장을 찾은 이들만 400여명, 오프라인에서 토론모임을 이어가는 이들이 100여명이다. 미래 참여단을 거쳐 간 이들을 모두 합하면 연간 2만명을 넘어선다. 김은곤 PD는 “토론이 시작되면 방청석에 긴 줄이 늘어서고, 1시간 반 이상 토론이 이어진다”며 “시민들의 여론을 반영한다는 측면에서 ‘리트머스’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제작진은 ‘명견만리’를 하나의 브랜드로 만들고, 콘텐츠 유통 방식도 다각화하고 있다. 베스트셀러가 된 《명견만리》의 후속편으로 윤리, 기술, 중국, 교육 등의 이슈를 담은 《명견만리-미래의 기회 편》을 출간했다. 모바일 시대에 맞춰 ‘명견만리 플러스’라는 온라인·모바일 전용 콘텐츠도 새로 제작했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저자 홍세화 씨, 프로게이머 이두희 씨, 청춘상담소 ‘좀 놀아본 언니들’의 장재열 씨, 영화 ‘판도라’의 박정우 감독 등이 강연자로 나서 5~10분간 짧은 강의를 선보이는 콘텐츠다. 지난해에는 14세 중학생 김석규 군이 “학원에 안 다니면 비정상인가요?”라며 사교육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방송이 조회수 100만건을 넘어서며 화제가 됐다.
이 PD는 “회사에서는 인정해주지 않는 ‘가욋일’인데도 ‘명견만리 플러스’를 제작한 건 플랫폼은 변화하는데 우리는 평생 ‘올드 미디어’로 살아갈 것인가 하는 불안감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김 PD는 “플랫폼의 변화에 발맞춰 다양한 콘텐츠를 제작함으로써 기존 시청자뿐만 아니라 젊은 층의 니즈까지 수용하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