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민음사 박맹호
“지금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전화하는 거요. 기내에서 몇 번씩 읽었는데 그 기사 제목 우리 책 광고 카피로 써도 좋겠다 싶어서….”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늘 ‘문청(문학청년)’이자 ‘출청(출판청년)’이었다. 30년 아래의 젊은 문학 기자와 통화할 땐 더 청춘이 된다며 좋아했다. 첫 시집은 꼭 자기가 내야 한다며 원고를 독촉할 때도 그랬다. “벌써 몇 년째야. 너무 묵히면 원고가 늙으니 빨리 줘요.”

박맹호 민음사 회장. 충북 보은 비룡소에서 자랄 때부터 그는 문학을 꿈꿨다. 그 고장에서 가장 세금을 많이 내는 사업가 부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돈 안 되는’ 책에만 매달렸다. 경복중학교를 오갈 땐 삼각지 로터리의 대동서점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었다. 대학 시절 소설 당선에 이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도 붙었지만 정치 풍자가 지나치다는 이유로 낙선된 뒤, 그는 창작에서 출판으로 선회했다.

민음사 등록허가증이 나온 건 서른세 살 때인 1966년. 사무실이 없어 처남이 운영하던 광화문의 ‘전일사’라는 전화 판매점에서 출발했다. 의자도 없이 전화만 겨우 받을 뿐, 편집과 교정 작업은 집에서 했다. 몇 달 지나지 않아 돈이 바닥났다. 그러다 번역서 《요가》가 빵 터졌다. 순식간에 1만5000여권이 팔렸다. 이후 청진동 세진빌딩 4층으로 옮겨 본격적으로 출판에 나섰다.

그러나 ‘첫 대박’ 이후 내리막길에 들어 빚더미에 앉았다. 그런 중에도 ‘세계 시인선’과 ‘오늘의 시인 총서’를 냈다. 일어판 중역이 아니라 전공자 완역에 원문까지 실었다. 대성공이었다. 국내 시인들의 시집은 날씬한 판형의 국판 30절 크기로 냈다. 이는 한국 시집의 표준이 됐다.

또 하나. 민음사를 종합대학 정도의 아카데미 허브로 키우고자 대우재단과 함께 ‘대우학술총서’를 시작해 16년간 424권을 냈다. 대우그룹이 와해되면서 밀린 제작비 수천만원 대신 자동차를 받는 아픔도 겪었다. 신문에 5단 통광고, 전면 컬러 광고를 처음 낸 것도 그다. 그것도 신문 서평을 활용해 핵심 내용을 알리고자 했다.

2005년 간 이식 수술 후 그는 “삶에 임하는 자세가 더 적극적으로 변했다”며 트위터를 배우는 등 젊은 감각을 놓치지 않았다. 몇 년 전까지 “오늘도 새벽에 신문들을 정독하고 출근할 시간을 기다린다”던 그가 어제 84세로 세상을 떴다. “‘완성된 인간’은 책 없이 불가능하고, 출판은 각자 자신의 공화국을 만들어가는 행위”라며 51년간 지식과 지혜의 공화국을 일구던 그가.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