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해피엔딩', 너무나 인간적인 로봇의 러브스토리
“똑똑똑, 제 충전기가 고장 나서요.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어딘가 어색한 말투, 경직된 몸짓으로 클레어가 건너편 집 대문을 두드린다.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방전돼 버린 클레어. 당황한 집주인 올리버는 고민 끝에 클레어의 ‘충전’을 도와준다. 남녀 주인공의 첫 만남은 이렇게 시작한다. 말투와 행동이 닮은 둘은 사실 인간을 돕도록 프로그래밍된 로봇 ‘헬퍼봇’이다.

서울 동숭동 DCF대명문화공장에서 공연 중인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사진)은 인간에게 버려진 채 외롭게 살아가는 두 헬퍼봇 올리버와 클레어의 모습을 그린다. 로봇과 인공지능이 지배하는 미래를 ‘디스토피아’로 그려온 공상과학(SF) 영화들과는 다르다. 극 중 배경은 가까운 미래, 서울 코스모폴리탄 외곽 낡은 아파트에 있는 올리버의 방이다. 이곳은 첨단과학 시설 대신 아날로그 감성을 자극하는 물건으로 가득하다. 로봇들은 태어날 때부터 ‘선한 존재’로 그려진다.

올리버는 자신을 ‘진정한 친구’로 대해줬던 주인 제임스가 언젠가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클레어는 다르다. 옛 주인들을 보며 ‘관계’와 ‘사랑’에 냉소적인 감정을 품고 있다. 둘은 함께 제주도로 떠난다. 올리버는 그곳에 사는 제임스를 만나기 위해, 클레어는 평생 소원인 반딧불을 보기 위해서다.

두 로봇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사랑의 감정이 무엇인지를 배운다. 그 과정이 너무나 인간적이다. 소심하지만 늘 희망을 잃지 않는 올리버와 발랄하지만 냉소적인 클레어는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외로웠던 상대방의 삶에 서서히 스며든다. 둘 다 구식 로봇이라 더 이상 부품이 만들어지지 않고, ‘죽음’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다는 설정도 인간과 닮았다.

로봇이라는 소재와 아날로그 감성의 어울리지 않는 만남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재즈 음악을 좋아하는 올리버가 턴테이블에 LP판을 올릴 때면 제임스 역을 맡은 배우 고훈정이 나와 감미로운 재즈곡인 ‘우린 왜 사랑했을까’를 들려준다. 피아노와 현악기로 구성된 6인조 밴드는 두 로봇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어쿠스틱한 음악으로 표현해낸다.

여행 가방은 어느새 전조등을 밝힌 자동차로 변하고, 두 로봇은 반딧불 가득한 제주도 숲속을 거닌다. 전미도와 정문성이 연기하는 클레어와 올리버는 때 묻지 않고 순수하다.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헤어짐을 두려워한 두 로봇이 자신의 기억을 지우는 장면은 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떠올리게 한다. 기억을 지운 뒤에도 운명처럼 서로를 찾는 모습이 극의 첫 장면과 오버랩되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를 합작한 박천휴(극작), 윌 애런슨(작곡) 콤비의 신작이다. 3월5일까지, 4만~6만원.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