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쪽 색깔이 다른 눈동자란 뜻의 ‘오드 아이(odd-eye)’는 한경닷컴 기자들이 새롭게 선보이는 코너입니다. 각을 세워 쓰는 출입처 기사 대신 어깨에 힘을 빼고 이런저런 신변잡기를 풀어냈습니다. 평소와 조금 다른 시선으로 독자들과 소소한 얘기를 나눠보려 합니다. <편집자 주>

김국환의 '타타타' 열풍을 다룬 1992년 2월11일자 경향신문 기사. / 출처=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김국환의 '타타타' 열풍을 다룬 1992년 2월11일자 경향신문 기사. / 출처=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김봉구 기자 ] 25년 전 이맘때다. 가사가 인상적인 노래가 인기를 끌었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로 시작하는 김국환의 ‘타타타’였다. 요즘말로 하면 무명가수의 ‘역주행’이었다. 한 해 전 나온 노래가 인기 주말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에 삽입되면서 빵 떴다.

달력을 찾아봤다. 1992년 음력 설은 2월4일 화요일, 주말부터 이어지는 황금연휴였다. 한국언론재단 뉴스 데이터베이스 ‘카인즈’의 그해 3월1일자 기사에 따르면 “2월 1·2일 이 노래가 드라마에 등장하자마자 노랫말에 공감하는 중년층 주부들 사이에 음반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면서 품절소동이 벌어지는 등 장안의 화제가 됐다.”

‘아재 인증’일 테지만 ‘국민학생’에겐 TV만화 주제가 목소리로 더 친숙했다. (초등학교로 명칭이 바뀐 것은 1996년이다.) ‘은하철도999’ ‘메칸더V’ ‘미래소년 코난’ 주제가를 김국환이 불렀다. 그런 그가 ‘산다는 건 좋은 거지 수지맞는 장사잖소/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라고 했다. 동일 인물임을 알았을 때의 이질감이란.

당시 유행가를 또렷이 기억하는 건 바로 그해 설날의 에피소드 때문이다.

지리산 자락 시골이 내 큰집이다. 일가 친척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어서 남자들은 집집마다 돌며 제사를 지냈다. 한 바퀴 돌고 나면 하루해가 저물었다. 그때는 큰집에 현대식 부엌도 없었다. 아궁이와 마당에 딸린 수돗가 뿐이었다. 겨울이면 수도가 얼까봐 수도꼭지를 살짝 틀어놓곤 했다.
가수 김국환은 '자 이제부터 접시를 깨자/접시 깬다고 세상이 깨어지나'라고 노래했다. /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가수 김국환은 '자 이제부터 접시를 깨자/접시 깬다고 세상이 깨어지나'라고 노래했다. /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집안 제사를 모두 마치고 밤이 되었다. 막내며느리였던 어머니가 한 짐 설거지거리를 챙겨 마당으로 나갔다. 마루에 걸터앉아 지켜보던 어린 시절의 내가 불쑥 말했다. “왜 우리 엄마만 일해요?” 잠깐 정적이 흘렀던 기억. 돌이켜보면 혼자 차디찬 물로 설거지해야 하는 어머니가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나조차 기억 못하는 어릴 적 내 얘기를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풀어놓는 분이다. 20년을 훌쩍 넘겨서도 이 ‘효자 코스프레’(효자인 척하는 것) 레퍼토리는 종종 회고된다. “느그 아부지는 한 마디도 안 하더라야. 아들이 낫대.” 슬쩍 아버지에 대한 핀잔도 섞어서.

어머니는 작년에 암 진단을 받았다. 다행히 초기에 발견해 치료 받으며 회복 중이다. 다만 집안일까지 챙기긴 어렵다. 부모님 두 분만 고향집에 계신 터라 대부분의 가사노동은 아버지 몫으로 돌아갔다. 어머니 말씀이 틀렸다. 타지에 산다는 핑계로 명절 때나 얼굴 비추는 아들보다는 힘들 때 곁에서 챙기는 남편이, 역시 낫다.

그해 김국환의 ‘타타타’ 후속곡은 ‘우리도 접시를 깨뜨리자’였다. 1인칭 시점으로 ‘앞치마를 질끈 동여매고 부엌으로 가서 놀자/(중략)/자 이제부터 접시를 깨자’고 노래했다. 서툴러도, 접시 좀 깨도 된다. 아버지의 설거지를 응원한다.

실은 남 말할 처지가 못 된다. 연휴 전이라 일이 몰리는지 아내가 연일 자정께 퇴근했다. 그렇잖아도 ‘워킹맘 과로사’ 헤드라인이 눈에 밟히던 참이다. “퇴근이 아니라 집으로 다시 출근했을 것”이라는 댓글에 가슴이 서걱거렸다. 나부터 열심이어야지. ‘접시 깬다고 세상이 깨어지나’ 노랫말을 흥얼거리면 힘도 날 것 같다.

김봉구 한경닷컴 기자 kbk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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