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앞으로 송유관 건설에 미국산(産) 철강재만 쓰라는 행정명령을 내려 국내 철강업계에 비상이 걸렸다. 통상마찰까지 각오한 트럼프 대통령의 자국 우선주의 정책으로 현대제철과 세아제강 등 국내 철강업체는 송유관, 유정용 강관 등의 미국 수출에 타격이 불가피하게 됐다.
◆연 40만~50만t 한국 송유관 ‘비상’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4일 미국 내 모든 송유관 건설에 들어가는 철강재를 미국산으로 제한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캐나다와 미국을 잇는 키스톤XL 송유관과 다코타 송유관 건설을 추진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에도 서명했다. 트럼프는 두 프로젝트의 행정명령과는 별도로 앞으로 건설되는 모든 송유관에 자국 철강재만 쓰도록 했다. 미 상무부는 이 행정명령에 따라 180일 안에 구체적인 시행 방안을 법과 제도로 만들어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고해야 한다.

미국에 송유관을 수출하는 국내 철강업계엔 비상이 걸렸다. 철강협회에 따르면 현대제철, 세아제강, 휴스틸, 넥스틸, 동양철관 등 국내 철강업계는 작년 47만t, 약 2900억원어치의 송유관을 미국에 수출했다. 매년 10만t가량의 송유관을 미국에 수출해온 현대제철과 세아제강이 가장 큰 피해를 입을 전망이다. 송유관을 건설하는 데 쓰이는 열연강판 후판 등을 공급해온 포스코도 피해 영향권에 있다.

이번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명령에서 정의한 미국산 철강은 ‘모든 제조 과정이 미국에서 이뤄진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최근 미국 내 공장을 인수한 세아제강도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세아제강은 보호무역주의에 선제 대응하기 위해 최근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의 유정용 강관 생산공장과 후처리공장을 1억달러에 인수했다. 세아제강이 이 공장 제품을 미국산으로 인정받으려면 원료, 소재, 반제품을 모두 미국 현지에서 조달해야 한다.

자국산 철강 사용 규제는 송유관뿐 아니라 채굴 과정에서 쓰이는 유정용 강관에까지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그 경우 예상 피해 규모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국내 철강업계는 작년 90만t, 약 5900억원어치의 송유관과 유정용 강관을 미국에 수출했다.

◆업계 반발에 통상마찰 우려

이번 행정명령이 시행되기까지는 진통도 예상된다. 세아그룹 고위 관계자는 1일 “이번 행정명령 때문에 많은 미국 내 수요자가 비싼 가격의 미국산 철강재를 써야 해 경제적으로 손해를 입을 수 있다”며 “미국에서 반대하는 수요자가 많아 실행 과정에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미국 내 철강업체의 로비력이 강하다 보니 이런 행정명령이 나와도 말 없는 다수의 수요층이 끌려가고 있다”면서도 “업계 반발로 미국 의회도 반대하면 시행까지는 오랜 시일이 걸릴 것”이라고 설명했다.

행정명령이 시행되는 과정에서 미 의회의 제동과 국제적인 통상마찰도 예상된다. 김지선 포스코경영연구원 수석연구원은 “한국을 포함해 세계무역기구(WTO) 정부조달협정에 가입된 40여개 회원국은 미국의 정책으로 차별을 당해선 안 된다는 조항이 있다”며 “행정명령은 WTO를 위배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국내 철강업계는 미국발(發) 보호무역주의 강화에 대비해 중동과 동남아시아로 수출 시장을 다변화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당장 미국 의존도가 커 피해가 불가피한 상태다. 국내 철강업계 수출 중 미국 비중은 13% 수준이다. 미국이 작년에 한국산 철강제품에 반덤핑 관세를 부과한 것은 17건인데 앞으로 추가적인 규제가 나올 가능성도 있다.

안대규 기자 powerzanic@hankyung.com